입력 : 2018.03.26 03:00 | 수정 : 2018.03.26 13:44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확산따라 기관투자자들 경영 관여 늘어]

국내 증시에 130조 이상 투자… '공룡' 국민연금도 하반기 참여
수백개 기업의 현안 분석하고 정부 개입 '연금 사회주의' 방지
전문·독립성 높일 장치 급선무

KB자산운용은 지난 1월 게임회사 컴투스에 "2015년 인수·합병에 쓰겠다고 유상증자한 1800억원을 왜 안 쓰고 있는지, 주주 정책의 방향성은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KB운용은 컴투스 지분 약 20%를 갖고 있는 2대 주주다. 이에 컴투스는 2월 기업 설명회를 열고 "당기순이익 중 배당금 비율을 10~15%를 유지하도록 하겠다"며 주주 친화 정책을 내놨다. KB운용은 또 지난 2월에는 지분 24%를 가진 스크린골프 회사 골프존에 "적자로 추정되는 사업부를 인수하려는 이유가 뭐냐"고 인수·합병에 대해서도 문제 삼았다.

기업 경영진 결정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많지 않아 '거수기'라 불렸던 기관투자자(연기금·자산운용사·은행 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기관투자자들이 앞장서 기업을 압박하면 배당 확대 같은 주주친화정책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 일반 소액 주주도 반긴다. 기업 경영이 투명해지는데 기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부 기업들은 "힘센 기관투자자 눈치를 보느라 경영하는 데 애를 먹을까 걱정"이라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 작동 시작?

올해 주주총회 시즌에는 사회적 이목이 집중된 주요 사안마다 기관투자자의 입에 재계의 관심이 쏠렸다. KT&G에서는 백복인 사장의 연임에 대해 IBK기업은행이 반대하면서 주총에서 표 대결이 벌어졌다. 국민연금과 한국투자신탁운용은 삼성물산 주총에서 2015년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에 찬성한 최치훈 사장 등의 사내이사 재선임에 반대했다. KB금융지주의 노조 추천 사외이사 선임 건에선 작년에는 찬성했던 국민연금이 반대로 돌아선 게 큰 화제가 됐다.

 

자본 시장의 큰손 국민연금

기관투자자들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국내에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확산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자들이 지분을 보유한 기업의 의사 결정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지침이다. 기관투자자가 자율적으로 도입을 결정한다. 2016년 말 국내에 처음 도입됐을 때만 해도 하겠다고 나서는 곳이 많지 않았지만, 스튜어드십 코드 활성화를 공약으로 내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최근까지 기관투자자 69곳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삼성·미래에셋 등 자산 운용 규모 기준 10대 자산운용사가 모두 포함돼 있다.

여기에 자본시장의 '공룡' 국민연금이 하반기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다. '힘센 기관투자자'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시장에만 130조원 이상을 투자하고 있다. 지분 5% 이상 가진 기업은 270곳이 넘고, 지분율 10% 넘는 기업도 SK하이닉스·포스코 등 90곳에 육박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워낙 영향력이 크다 보니 다른 기관투자자들 입장에서 기업 현안에 대해 국민연금 결정을 따라가면 나중에 책임 추궁을 당할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런 쏠림 현상이 앞으로 더 심해지면서 국민연금을 포함한 기관투자자 집단의 영향력이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기관투자자 독립성·전문성이 관건

힘이 세지는 만큼 기관투자자들의 독립성과 전문성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1년 중 단 하루 만에 300~500개 기업이 한꺼번에 주주총회를 여는 현재 상황에서 기관투자자들이 기업들의 수많은 안건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관투자자들은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대신지배구조연구소, 서스틴베스트 등 의결권 자문사와 계약해 조언을 받고 있다. 그러나 자문사의 전문성과 객관성을 검증할 장치가 없어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20명 안팎 직원을 둔 의결권 자문사가 기업 안건 수백개를 제대로 분석할 역량이 있는지 의문"이라며 "기관투자자들이 민감한 사안에서 자문사 의견을 따르지 않으면 이유를 추궁당하니 주식 단 한 주도 없는 자문사의 영향력만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을 통해 정부가 기업 경영에 개입하는 '연금 사회주의'에 대한 우려도 있다. 620조원 이상을 굴리며 의결권을 행사하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본부장은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장의 추천을 받아 보건복지부 장관이 임명한다. 거기다 국민연금공단 김성주 이사장은 대선 캠프 출신이며 더불어민주당 전(前) 의원이다. 외부 전문가로 꾸린 의결권 전문위원회에도 정부와 노동계 추천 인사가 포함돼 있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민연금의 시장 영향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국민연금의 지배구조를 개선해 독립성을 높일 장치를 마련하는 게 본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