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엽기적인 그녀'에서 벗어나야죠"

곽재용(58) 감독에게 영화란 말갛게 잘 닦아놓은 유리구슬 같은 것이다. '비오는 날 수채화'(1989) '엽기적인 그녀'(2001) '클래식'(2003)에서 그랬듯, 그는 오랫동안 현실 속 때나 먼지를 닦아낸 듯 맑고 또렷한 사랑과 청춘을 그려왔다.

다음 달 5일 개봉하는 새 영화 '바람의 색'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 홋카이도에서 마술사 료(후류카와 유우키)는 헤어진 연인과 똑 닮은 아야(후지이 다케미)를 마주친다. 료는 곧 서로가 각자의 도플갱어(분신)와 사랑에 빠지게 됐음을 깨닫는다. 29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곽재용 감독은 "오우삼·서극 감독을 좋아하던 영화학도 시절부터 그랬던 것 같다"고 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감독도 있어야겠죠.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미학적으로 잘 짜인 그 무엇을 동경해왔어요. 지금 여기보단 다른 어딘가에 있는 것 말이죠. 황순원 '소나기' 장면이 그렇고,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그런 것처럼 말이죠."

곽 감독은 언제나 풍경에 가장 공을 들인다. '바람의 색'에선 홋카이도 앞바다에 눈부시게 흩어진 유빙(流氷), 기차와 자동차로 각각 나란히 달리는 두 남녀, 비 오는 날 아야가 맨발로 걸어가는 모습을 료가 일회용 카메라로 찍는 장면에 특히 신경 썼다. 곽 감독은 "배우만큼이나 풍경에 집중한다"면서 "이번 영화 첫째 주인공도 사실은 홋카이도였다"고 했다. "어디서 어떤 장면을 어떤 음악을 깔고 찍을지 다 정해놓고 캐스팅을 시작했으니까요. 이 모든 게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촬영을 시작할 수 없죠."

'보편적인 멜로만 찍는다'는 말도 듣는다. 곽 감독은 "스릴러나 시대극을 시도한 적도 있긴 하다. 몇 편은 망했고 또 그중 몇 편은 찍는 도중 아예 제작이 엎어졌다. 자꾸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이젠 운명인가 싶기도 하다"며 웃었다.

'바람의 색'은 한·일 합작영화다. '철피아노'(2011) '재세계중심호환애'(2016)처럼 곽 감독은 이전에도 중국 같은 외국 제작사·투자사와 손잡고 영화를 자주 찍었다. 그는 "나이 들수록 한계가 생긴다. 그걸 깨기 위한 노력"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투자자나 제작자는 50세 넘은 감독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웃음). 한국에서 찍을 수 있는 멜로 영화라는 게 대개 틀이 정해져 있다는 점도 아쉽고요. 아직도 제게 '엽기적인 그녀' 같은 영화를 찍어달라고만 하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랄까…." 배우 손예진과 새 영화를 찍는 것도 구상 중이다. "손예진씨도 그사이 결이 풍부해졌고 저 역시 경험이 더 쌓였으니 이젠 다른 영화를 찍을 수 있지 않을까요. 멜로가 늘 한 가지 빛깔은 아닐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