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상생이 '미투'의 본질… 혈투로 변질될까 걱정"

"1969년 등단했으니 50년 동안 시인으로 살아온 셈이다. '페니스'를 지닌 남자만 펜을 휘두르는 것으로 생각해 온 한국 문단에서 나의 펜으로 시를 열정적으로 써왔지만, 열네 번째 시집을 묶고 보니 결국 '폐허'에 이르렀다는 아쉬움도 든다."

문정희(71) 시인이 새 시집 '작가의 사랑'(민음사)을 냈다. 11개 외국어로 번역된 시집도 14권이나 되는 문 시인은 2010년 스웨덴의 시카다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독창적인 표현과 원시적이고 폭발적인 힘으로 생명의 신성성과 여성과 남성, 자연의 순결성을 노래한 시의 기수"라는 것이 선정 이유. 이후 국제 시인대회에 숱하게 초청된 경험이 이번 시집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표제작 '작가의 사랑'은 국적이 다른 '여성 작가 여섯이 한 방에 모여/ 사랑의 경험을 이야기하자고 한 밤'이라며 시작한다. 폴란드 시인이 '아우슈비츠를 알기 전에 사랑을 말하는 것은/ 진정한 작가가 아니야'라고 외쳤다. 그러자 다른 작가가 '잘 알아, 하지만 작가가 언제까지/ 한곳에 못 박혀 있을 수는 없어/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인간을 더 깊이 써야 해'라고 반박한다. 역사와 문학이 충돌한 순간 문정희 시인이 돌출 발언을 했다. '내가 불쑥 말했어/ 애국심은 팬티와 같아 누구나 입고 있지만/ 나 팬티 입었다고 소리치지 않아/ 먼저 팬티를 벗어야 해.' 그러나 정작 시인은 '하지만 나는 끝내 벗지 못한 것 같아'라며 '눈만 뜨면 팬티를 들고 흔드는 거리에서 자란/ 나는 하나를 벗었지만, 그 안에/ 센티멘털 팬티를 또 겹겹이 입고 있었지/ 사랑은 참 어려워/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라고 탄식했다.

최근 광화문에서 만난 시인은 "촛불과 태극기 집회의 충돌이 보여줬듯이, 우리 사회는 '광장'에서 '팬티'를 흔들며 일사불란하게 '합창'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다"며 "나는 단독자(單獨者)로서 자유롭게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는 시인으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시인은 가부장제의 전통도 꾸준히 비판해왔다. 이번 시집에선 '무지한 전통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두려운 결혼 속으로 멋모르고 뛰어들었지/ 전쟁보다 정교하게 여성을 파괴시킨다는/ 결혼 외에는 어디에도 갈 데가 없었지/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고 했다. '이제, 이 땅이 모진 식민지를 벗어난 지도 70여년/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고도 절규했다.

시인은 "한국 사회는 남녀의 동물적 능력만 강조하는 밀림"이라며 "남성의 욕망은 정력제가 대표하고, 여성의 욕망은 외모지상주의에 오염됐다"고 질타했다. 그래서 시인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미투' 운동의 본질은 '남녀 상생'인데, 자칫 '남녀 혈투'로 변질될까 봐 걱정된다"며 "한때의 광풍(狂風)으로 그칠 게 아니라 지성과 이성의 회복으로 가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