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4.05 01:04

연극 '엘렉트라' 주역 장영남, 소포클레스 비극의 여전사로
"7년 만에 돌아온 연극 무대… 이번 작품은 연기 인생 반환점"
오는 26일 LG아트센터서 개막

"겉으로 보이는 강함보다 내면의 강함이 중요한 역할이에요. 폭발하는 게 아니라 에둘러 삭이면서 내놔야 해요. 그러려면 여기, 이 안에 더 많은 걸 품어야 하고요."

배우 장영남(45)이 주먹 쥔 두 손을 자기 배 위에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 안에 불덩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 불은 얼음처럼 차갑고 푸른 불일 것이다.

장영남은 오는 26일 개막하는 연극 '엘렉트라(연출 한태숙)'의 주역으로 무대에 선다. 아버지를 죽이는 어머니에게 복수하는 딸 엘렉트라를 그린 희랍 비극이 원전. 소포클레스 비극 중 '오이디푸스'(2011)와 '안티고네'(2013)를 무대에 올렸던 한태숙 연출에 서이숙·예수정 등 검증된 배우들이 함께 출연한다. 최근 서울 소공동에서 만난 장영남은 "침묵할 때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찾아 섬세하게 끄집어내는 것이 제일 큰 숙제"라고 했다. 표정은 웃고 있는데, 단어마다 또박또박 힘이 들어간다.

한태숙 연출의 '엘렉트라'로 7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배우 장영남은
한태숙 연출의 '엘렉트라'로 7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배우 장영남은 "연기를 하며 치유받고 에너지를 얻었는데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슷비슷한 역할을 하며 소진되고 있었다. 엘렉트라는 내게 새로운 시작 같은 작품이라 모든 걸 쏟아붓고 있다"고 했다. /이진한 기자

장영남의 엘렉트라는 트로이 전쟁 뒤 미케네였던 원전의 배경을 현대 어딘가의 반군(反軍) 진지로 옮겨온다. 무너진 신전 아래 지하 벙커, 장영남은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를 묶어 놓고 복수를 준비하는 게릴라 여전사가 된다. 그는 "희랍 비극에서 신(神)은 인물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존재인데, 이번 엘렉트라는 그 신을 부순 자리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마을에 폭탄을 터뜨려 살인마로 불려요. 분노와 증오를 정의라고 스스로 포장하지만 늘 흔들리죠." 자기 복수의 정당성조차 확신 못하는 불안정한 엘렉트라라니. 장영남은 "관객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멀찍이서 바라보다 그 마음에 끌려들게 하고 싶다. 연기로 그 페이소스를 만들어내려 노력 중"이라고 했다.

소싯적 장영남은 '대학로 이영애'로 불렸다. 연기력과 미모를 다 갖춘 연극계 스타였고, 연기상도 많이 받았다. 여릿한 인상과 달리 깡과 집중력이 악착같다. 스물셋에 극단 목화에 들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을 맡았다가 1주일 만에 잘렸지만, 이 악물고 버티며 성장해 7년 뒤 다시 줄리엣 역할을 따낸 적도 있다. 그가 앉은 채 오뚝이처럼 몸을 숙였다 세워 보이며 말했다. "극한 상황이 오면 튕기듯 다시 일어나는 것 같아요. 자꾸 연기 못 한다니까 어떻게든 더 잘해야지 하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대학로 연극판 인연으로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2004)에 출연한 뒤 영화와 TV 드라마 활동도 활발했다. '늑대소년'의 순이(박보영) 엄마, '국제시장' 피란민 엄마가 인상 깊다. 국제시장의 흥남 철수 장면 촬영 때 장영남은 임신 5개월의 몸으로 한복 아래 잠수복을 받쳐 입고 찬물 속에 뛰어들었다.

장영남은 이번 작품으로 2011년 차범석 희곡 '산불' 공연 뒤 7년 만에 고향 같은 무대로 돌아왔다. 그는 "인생 반 언저리쯤 온 것 같은데, 지금 변화를 줘야 나머지 반을 새롭게 맞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렉트라는 제게 인생의 반환점 같은 작품"이라고 했다. "여전히 배우 걸음마 중이에요. 할 때마다 '초짜' 같아요. 연기가 그래서 어려워요. 그래서 더 매력 있고, 끊지 못하겠고." 무대 위 초심으로 돌아온 장영남의 엘렉트라는 서울 역삼동 LG 아트센터에서 다음 달 5일까지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