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4.05 03:07

적폐청산이 낳은 新복지부동… 공무원 요즘 인사는 "몸조심하라"

세종시 정부 중앙 부처의 과장급 공무원 A씨. 그는 문재인 정부의 핵심 공약과 관련된 업무를 맡고 있다. 매일 야근을 하고 일요일에 출근하는 일도 잦다. 이런 그가 업무 외 스트레스로 잠이 안 온다고 하소연했다.

"적폐청산위원회 발표가 이어지면서 선배·동료들로부터 '몸조심하라' '일은 하되 열심히 하지 말라'는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국장급은 이 정부에서 승부를 봐야 하는 사람들이라 뒤도 안 돌아보고 돌진한다고 하지만 중간에 낀 우리는 뭡니까. 정권이 바뀌면 똑같이 적폐로 몰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잠이 안 옵니다."

또 다른 공무원 B씨는 "예전엔 문제가 발견되면 감사원에 불려다녔는데 이젠 적폐로 인민재판까지 받게 됐다"며 "예전보다 토론이 줄었고 토론을 해도 되도록이면 얘기를 안 한다"고 했다.

적폐 청산발(發) '신(新)복지부동'이 퍼지며 공직 사회가 흔들리고 있다. 본지가 인터뷰한 공무원 상당수가 "자괴감이 느껴진다" "중요 보직 대신 가늘고 길게 갈 수 있는 자리가 최고"라고 했다.

공무원들 "가늘고 길게 가는 게 최고"

관가의 적폐 청산 바람은 다양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각 부처마다 적폐청산위원회 위원과 보좌관 등 외부인들이 사실상 행정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되고 있다. 경제 부처의 과장급 공무원은 "맡은 업무보다 적폐청산위원회 위원이 시킨 심부름을 먼저 하게 된다"고 털어놨다.

공직 사회 흔드는 적폐 청산 바람 그래픽
/그래픽=김성규
살아남기 위해 부처 내에서 정치 활동에 몰두하는 공무원도 나오고 있다. 공무원 C씨는 "간부들 중에는 '흙수저 코스프레'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도 꽤 있다"며 "전 정부에서 박해당했다고 주장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직원들끼리 음해하는 투서가 난무해 뒤숭숭한 부처도 있다고 한다.

정부 관계자는 "내부 TF나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등 조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어 조직 내부가 불안하다"고 말했다. 적폐청산위 조사를 받았다는 한 공무원은 "잘못된 정책은 고칠 필요가 있지만 현재 진행 중인 적폐 청산 활동은 결론을 정해놓고 끼워 맞추기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과거에 매몰된 관료 사회

이 같은 모습을 지켜보는 많은 전문가들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우리나라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손바닥 뒤집듯 정책이 바뀌는 바람에 정책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는다. 2017년 세계경제포럼(WEF)이 낸 국가 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서 활동하는 기업인들은 기업 경영의 가장 큰 애로 사항으로 정책 불안정성(1위), 비효율적 관료주의(3위) 등을 꼽았다. 이런 와중에 전 정권 정책 실행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담당 공무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면 정책의 일관성은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상협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초빙교수는 "당장 사고만 막자는 단기주의(Short-termism)가 가장 큰 걱정"이라며 "이웃 중국과 일본은 실력 있는 엘리트 관료들이 앞다퉈 중장기 비전을 제시하고 달려가고 있는데, 우리는 거꾸로 관료들이 땅만 보고 눈앞에서 터지는 사태만 수습하는 데 급급하다"고 했다. 서울의 한 대학교수(행정학)는 "적폐 대상이냐 아니냐를 떠나 공직 사회 전체가 업무에 몰입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다"며 "결국 피해자는 정책의 대상자인 국민들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공무원들의 사기를 높이고 정치적 외풍으로부터 보호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책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엘리트 공무원들의 전문성을 살리고 소신 있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며 "정무적 판단에 대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어떤 경우에 상관의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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