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정부 중앙 부처의 과장급 공무원 A씨. 그는 문재인 정부의 핵심 공약과 관련된 업무를 맡고 있다. 매일 야근을 하고 일요일에 출근하는 일도 잦다. 이런 그가 업무 외 스트레스로 잠이 안 온다고 하소연했다.
"적폐청산위원회 발표가 이어지면서 선배·동료들로부터 '몸조심하라' '일은 하되 열심히 하지 말라'는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국장급은 이 정부에서 승부를 봐야 하는 사람들이라 뒤도 안 돌아보고 돌진한다고 하지만 중간에 낀 우리는 뭡니까. 정권이 바뀌면 똑같이 적폐로 몰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잠이 안 옵니다."
또 다른 공무원 B씨는 "예전엔 문제가 발견되면 감사원에 불려다녔는데 이젠 적폐로 인민재판까지 받게 됐다"며 "예전보다 토론이 줄었고 토론을 해도 되도록이면 얘기를 안 한다"고 했다.
적폐 청산발(發) '신(新)복지부동'이 퍼지며 공직 사회가 흔들리고 있다. 본지가 인터뷰한 공무원 상당수가 "자괴감이 느껴진다" "중요 보직 대신 가늘고 길게 갈 수 있는 자리가 최고"라고 했다.
◇공무원들 "가늘고 길게 가는 게 최고"
관가의 적폐 청산 바람은 다양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각 부처마다 적폐청산위원회 위원과 보좌관 등 외부인들이 사실상 행정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되고 있다. 경제 부처의 과장급 공무원은 "맡은 업무보다 적폐청산위원회 위원이 시킨 심부름을 먼저 하게 된다"고 털어놨다.
/그래픽=김성규
살아남기 위해 부처 내에서 정치 활동에 몰두하는 공무원도 나오고 있다. 공무원 C씨는 "간부들 중에는 '흙수저 코스프레'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도 꽤 있다"며 "전 정부에서 박해당했다고 주장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직원들끼리 음해하는 투서가 난무해 뒤숭숭한 부처도 있다고 한다.
정부 관계자는 "내부 TF나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등 조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어 조직 내부가 불안하다"고 말했다. 적폐청산위 조사를 받았다는 한 공무원은 "잘못된 정책은 고칠 필요가 있지만 현재 진행 중인 적폐 청산 활동은 결론을 정해놓고 끼워 맞추기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과거에 매몰된 관료 사회
이 같은 모습을 지켜보는 많은 전문가들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우리나라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손바닥 뒤집듯 정책이 바뀌는 바람에 정책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는다. 2017년 세계경제포럼(WEF)이 낸 국가 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서 활동하는 기업인들은 기업 경영의 가장 큰 애로 사항으로 정책 불안정성(1위), 비효율적 관료주의(3위) 등을 꼽았다. 이런 와중에 전 정권 정책 실행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담당 공무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면 정책의 일관성은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상협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초빙교수는 "당장 사고만 막자는 단기주의(Short-termism)가 가장 큰 걱정"이라며 "이웃 중국과 일본은 실력 있는 엘리트 관료들이 앞다퉈 중장기 비전을 제시하고 달려가고 있는데, 우리는 거꾸로 관료들이 땅만 보고 눈앞에서 터지는 사태만 수습하는 데 급급하다"고 했다. 서울의 한 대학교수(행정학)는 "적폐 대상이냐 아니냐를 떠나 공직 사회 전체가 업무에 몰입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다"며 "결국 피해자는 정책의 대상자인 국민들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공무원들의 사기를 높이고 정치적 외풍으로부터 보호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책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엘리트 공무원들의 전문성을 살리고 소신 있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며 "정무적 판단에 대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어떤 경우에 상관의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