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대웅제약 주주총회에서 이종욱 부회장이 고문이 되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종욱 고문은 유한양행 연구소장 출신으로 12년간 대웅제약을 이끌었다. 뒤를 이어 대표이사에 오른 사람은 40대의 전승호 사장. 글로벌전략팀장, 글로벌마케팅태스크포스(TF)팀장 등을 거쳐 글로벌사업본부를 총괄한 글로벌 마케팅 전문가다. 보령제약·영진약품·휴젤 등 다른 제약 업체들도 이번 주총을 통해 해외 사업통(通)을 대거 경영진에 발탁했다.
제약 업계 경영의 무게추가 해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의약품 해외 수출이 최근 가파르게 증가하면서 주요 제약사들이 해외 사업 경험이 있는 글로벌 전문가들을 외부에서 수혈하거나 발탁 승진시키고 있다. 상위 제약사의 해외 사업 담당자들에 대한 스카우트 경쟁도 벌어지고 있다. 이재국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상무는 "제약사의 의약품 수출뿐 아니라 기술 수출 사례도 늘면서 해외 시장에 정통한 인력이 각광을 받고 있다"며 "과거 제약사에서 큰 비중이 없었던 글로벌 사업 부문이 연구·개발(R&D) 분야와 함께 중요한 두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수출 개척할 글로벌 전문가 부상
전승호 대웅제약 사장은 이번에 윤재춘 사장과 함께 공동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다. 윤 사장은 관리·재무 업무를 맡고 전 사장은 해외 진출을 진두지휘할 예정이다. 당면 과제는 자체 개발한 주름 개선제 '나보타'의 미국 진출이다. 나보타는 미국 앨러갠의 보톡스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보툴리눔 독소(毒素) 의약품으로, 한두 달 내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기대하고 있다. 전 사장은 이미 70여 개국에 대한 나보타 수출 계약을 이끌었다.
보툴리눔 독소 제조 업체인 휴젤은 손지훈 전 동화약품 사장을 대표로 영입했다. 손 대표는 동아제약 해외사업부 전무와 박스터코리아 대표를 지냈다. 동화약품 대표 시절 몽골·캄보디아 등과 수출 계약을 체결하고 중동·북아프리카 12개국에 기술 수출을 하는 성과를 올렸다. 주름 개선제로 경쟁 관계에 있는 두 회사가 모두 글로벌 마케팅 전문가를 수장으로 교체한 것이다.
중견 제약사인 영진약품도 지난달 이재준 대표를 새로 선임했다. 이 대표는 다국적 제약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을 거쳐 동아제약의 전문의약품 계열사인 동아에스티에서 글로벌사업본부장을 지냈다. 동아제약이 GSK의 지분 투자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해외 진출을 시작할 때 주역으로 일했다. 보령제약은 GC녹십자의 글로벌마케팅본부장을 지낸 이선욱 전무를 글로벌사업본부장으로 영입했다. 이 전무는 보령제약의 고혈압 신약인 '카나브'의 수출 확대를 이끌 것으로 예상된다. 최태홍 보령제약 사장도 얀센 북아시아지역 총괄사장을 지낸 해외통이다.
◇오너 후계자도 해외에서 경영 수업
자연스럽게 최고경영자(CEO)들의 세대교체도 이뤄지고 있다. 2010년 상위 10대 제약사 중 7곳의 CEO가 연구소장 출신이었지만 대부분 물러났다. 이종욱 대웅제약 고문과 함께 김원배 동아제약 부회장, 이병건 GC녹십자 사장, 이관순 한미약품 사장이 최근 2년 사이 경영 일선에서 퇴진했다. 그 자리를 강정석 동아제약 회장, 허은철 GC녹십자 사장, 임종윤 한미사이언스(한미약품 지주사) 사장 등 창업주 2, 3세가 맡으면서 글로벌 전문가들을 대거 등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녹십자는 허일섭 회장의 장남인 허진성 부장이 최근 녹십자바이오테라퓨틱스(GCBT) 상무로 승진한 것이 눈에 띈다. 캐나다 법인인 GCBT는 혈액제제를 생산하는 회사로 북미 시장 진출의 전초기지이다. 이를 두고 고(故) 허영섭 녹십자 회장의 아들인 은철·용준(GC 부사장) 형제로 쏠리던 후계 구도에 변화가 올 가능성도 제기된다. 허일섭 회장은 허영섭 회장의 동생이다.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의 장남인 임종윤 사장도 2004년부터 중국 법인인 북경한미 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