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대부분이 중앙아메리카에서 생산돼 세계로 팔려나가던 1950년대 이전, 농업 기업들은 맛 좋고 잘 자라는 그로미셸(Gros Michel)이란 단일 품종 재배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로미셸은 수정(受精)이 까다로웠기 때문에 파종하지 않고 나뭇가지를 잘라 심는 꺾꽂이로 번식시켰다. 암수의 유전자를 섞지 않고 하나의 품종을 무한 복제하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 인간이 먹는 바나나 대부분은 유전적으로 동일한 품종이 됐다. 크기도 맛도 똑같았다.
단일 품종은 관리가 쉽고 대량생산이 가능해 경제적으로 이롭다. 하지만 종(種)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약점을 드러낼 위험이 커진다. 치명적인 병충해에 노출되면 절멸에 빠지고 만다. 바나나덩굴쪼김병균이 나타났을 때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에콰도르가 큰 피해를 보았고, 과테말라는 거의 모든 바나나 농장이 초토화됐다. 1950년대 이후 농업 기업들은 이 병균에 내성을 지닌 캐번디시라는 품종을 개발했지만 병균도 따라서 진화했다. 이 병균은 더욱 고약해서, 그로미셸과 캐번디시를 다 죽일 수 있다.
지구상의 수많은 종이 암수로 나뉘어 짝짓기하는 번거로운 방식으로 번식하는 이유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종의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해야 예기치 않은 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살아남아 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롭 던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교수는 유성 생식의 최고 승자인 인간이 아이러니하게도 식탁에 오르는 식품 종의 다양성을 훼손함으로써 스스로 재앙을 초래한 사례들을 보여주고, 그 배경에는 음식에 대한 탐욕과 자연을 인간이 제어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이 도사리고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빨리 자라고 수확이 많고 맛이 좋은 농작물을 심어 사시사철 식탁에 올리고 싶어 한다. 육종학, 녹색혁명, 유전자변형농산물(GMO)이 모두 이런 목적에 종사한다. 덕분에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식탁을 누리게 됐지만 섭취하는 열량의 80%를 불과 12종의 작물에서 얻고 있다. 그 과정에서 식물 종의 다양성이 훼손됐다. 1840년대 아일랜드를 휩쓴 감자 기근은 종의 다양성을 훼손한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기후가 춥고 습한 아일랜드에서 잘 자라는 감자는 인구를 늘리고 자식을 살찌우는 축복이었지만, 감자마름병 대유행을 위한 탄탄대로도 깔아줬다. 이 병이 감자밭을 휩쓸고 간 뒤 아일랜드인 100만명이 굶어 죽었다. 더 많이 수확하기 위해 재배 기간이 짧고 낮이 긴 곳에서 잘 자라는 럼퍼 감자만 주로 심은 것도 화를 키웠다.
/일러스트=박상훈
어리석음이 인간의 본성임을 드러내는 사례도 있다. 대규모 카카오나무 농장들이 들어선 브라질 바이아주(州)에 1989년 치명적인 빗자루병이 유행했다. 2년 뒤 이 지역의 카카오나무 75%가 사라졌다. 카카오나무만 경작한 것이 피해를 키웠지만 발병의 원인이 뜻밖이었다. 브라질 좌파 노동자당 당원 일부가 카카오 농장주들로부터 토지를 빼앗아 민중에게 돌려줄 생각으로 빗자루병을 몰래 퍼뜨린 것으로 드러났다. 그들의 바람대로 수많은 농장이 무너졌지만, 그곳에서 일하던 농민 20만명과 가족 등 100만명이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와 반대로 거룩한 목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례도 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식물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1887~1943)가 전 세계를 돌며 수집하거나 이후 개량한 종자 18만7000종을 보관하는 종자연구소가 있다. 이 도시 주민 150만명이 2차대전 때 900여 일에 걸친 독일군의 봉쇄로 굶어 죽었다. 희생자 중엔 바빌로프 연구소 직원 30여 명도 있었다. 그들은 보관 중인 곡식을 먹으면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도 종자 포대에 둘러싸인 채 생을 마감했다. 그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지켜낸 씨앗 중 400여 품종이 오늘날 러시아 전역에서 땅에 뿌려져 후손을 먹여 살리고 있다. 생물학 교양서인줄 알고 집어 들었는데 총천연색 인간 드라마로 읽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