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그냥 딸바보입니까, '빠미니스트'입니까

20대 두 딸을 둔 사업가 오영수(71)씨는 요즘 친구들에게 경력단절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선물하고 있다. 두 딸 낳기 전까지 그의 별명은 마초 중에서도 지독한 마초라고 해서 '대마초'. 한데 딸을 키우며 상황이 달라졌다.

"큰딸이 물어요. '나 낳고 딸이라 섭섭하지 않았냐'고. '섭섭하진 않았는데 화가 났다. 내 자식이 나 같은 마초들이 사는 세상에서 여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게 싫었다'고 답했죠." 오씨는 "딸 낳은 뒤엔 주변 남자들에게 '군대 몇 년 갔다 온 게 평생 생리하고 출산하는 것에 비하면 뭐가 대단하냐' 한다"면서 "내 딸들은 좀 더 좋은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82년생 김지영'을 사서 나눠준다고 했다.

'미투(Me Too) 열풍'을 타고 딸 가진 아빠들의 젠더 감수성이 주목받고 있다. 일명 '빠미니즘(아빠＋페미니즘)'이란 신조어도 나왔다. 스무 살 여성 유진씨가 최근 출간한 '아빠의 페미니즘'에서 "아빠들은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며 제안한 단어다. 유진씨는 아버지가 엄마에게 속옷 찾아달라고 부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단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지 빤스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양말을 아무 데나 막 던지는 놈들이야말로 잠재적 성범죄자야. 권력이 폭력으로 작동하는 건 일상에서부터 무의식에 각인된 결과야."

실제로 성평등 구현에는 딸 가진 아빠들의 자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국 경제학자 에보니아 워싱턴의 논문에 따르면 딸을 여럿 키운 국회의원일수록 성평등에 대한 인식도가 높게 나왔다. 딸을 한 명이라도 둔 남자 판사들이 딸이 없는 판사보다 성차별 사건에서 더 진보적인 판결을 내린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국내 미투 열풍을 촉발시킨 서지현(45) 검사는 검찰 내부통신망에 올린 소설 형식의 폭로 글에 이렇게 썼다. "이 모든 게 아빠 때문이다. 여자가 아빠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착하고 예쁜 내 딸'이었다.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자를 착하고 예쁜 딸로 키워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어떠한 불의도 참아내지 말라고, 그 어떠한 부당함에도 입 다물지 말라고, 욕설하고 소리 질러대며 절대로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네 멋대로 그렇게 살아가라고 그렇게 가르쳐줬어야 했다."

30~40대 아빠들을 겨냥한 잡지 '볼드저널'은 최근호 주제를 '아빠의 젠더 감수성'으로 잡았다. 일곱 살 딸을 둔 김치호(42) '볼드저널' 발행인은 "딸이 또래 집단이라든가 미디어 영향으로 '난 여자니까 핑크색을 입어야 해' 같은 편견을 습득하더라"면서 "부모, 특히 아빠의 젠더감수성이 절실하다는 고민에서 기획했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딸을 둔 회사원 김태석(50)씨는 "유명인들이 성추행 폭로로 한순간에 추락하는 걸 보면 같은 남자 입장에서 안됐다는 동정심이 생기기도 하지만, 딸 가진 아빠로서 다시 생각해보니 세상이 이렇게 바뀌는 게 맞더라"고 했다.

빠미니즘과 함께 아들 둔 엄마의 젠더감수성 '마미니즘'도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팔로어 44만명을 둔 인스타툰 '며느라기' 작가 수신지가 지난 설 특집으로 올린 '며느라기 프리퀄'엔 분노의 댓글 5000여 개가 달렸다. 주인공 민사린과 무구영의 결혼 전, 무구영이 가부장적 명절 문화를 강요하는 시어머니에게 반기를 드는 형수를 보고 '엄마, 조금만 기다리세요. 사린이는 잘할 거예요. 사린이는 착하니까'라고 생각하는 장면에서다. 9세, 5세 두 아들을 둔 회사원 유은서(40)씨는 "이 만화를 보고 우리 아들들은 젠더 감수성 풍부한 남자로 키워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빠미니즘이 자칫 '가족이기주의'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자칭 '딸바보' 연예인들이 미투 가해자로 지목된 일련의 사건들이 대표적인 예다. 여성학자 조주은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일·가정 양립을 잘하는 남자들도 사회에 나와서는 성폭력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역설"이라며 "요즘 아빠들의 육아 참여도가 예전보다 높은 건 고무적이지만 자기 자식 스스로 키우는 걸 치켜세울 일은 아니다"고 했다. "진정한 젠더 감수성이란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여성이 사회적 약자라는 걸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남성들이 가족은 물론 사회공동체라는 더 큰 틀에서 성찰적으로 여성들을 바라봐야만 진짜 성평등 사회를 앞당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