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문화유산 답사] [5] 양평 구정승골 ②증좌의정(贈左議政) 병조판서(兵曹判書) 제정공(齊靖公) 신효창(申孝昌)

입력 : 2018.04.12 14:06

양평 구정승골 두 번째 이야기는 증좌의정 병조판서 제정공 신효창이다. 신효창은 앞서 살펴본 좌정승 김사형의 사위로 장인의 묘 앞에 자신의 묘를 써서 현재 두 개의 묘가 아래위로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이 자리는 풍수학제조를 지낼 만큼 풍수에 일가견이 있었던 신효창이 잡은 자리라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의 산천 근원을 다 알고 있었기에 주변에서 좋은 묘를 구해달라고 부탁하면 어느 고을 어느 지점에 좋은 자리가 있으니 그곳에 가보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 그곳을 가보면 신효창이 말한 대로 똑같은 자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 그가 장인 장모와 함께 자신의 묘를 잡았다고 하니 흥미롭다.

신효창의 묘는 장인 김사형 묘 앞에 있다. 부자지간이 상하 묘를 쓴 것은 자주 보았으되 장인과 사위가 한자리는 드물다. 뒤에 보이는 묘가 장인 좌정승 김사형과 장모 죽산 박씨의 합장묘이며 그 앞이 사위 신효창과 부인 안동 김씨의 합장묘이다. 장인의 묘를 조성하고 43년 뒤에 자신의 묘를 쓴 것인데, 묘의 상설은 장인과 사위가 비슷해 보인다. 이곳의 두 묘가 천하명당이라고 많은 사람이 찾아들지만, 이 답사기는 역사적인 문화유적을 찾아보는 일이기에 풍수지리는 논외로 하고자 한다.
신효창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우지(友之). 조선 개국 당시 음관으로서 사헌시사(司憲侍史)에 올랐으며, 상장군에 천거되었다. 1394년(태조 3)에 호조전서(戶曹典書)의 직책을 맡았고, 1396년(태조 5)에는 대사헌이 되고 태조가 북행(北幸)할 때에 동행하였다. 1403년(태종 3)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1404년(태종 4) 충청도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충청도에서 1년간 있으면서 사욕을 버리고, 선정을 행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1405년(태종 5) 동지총제(同知摠制)의 직을 받아 서울로 돌아왔고, 1418년(태종 18) 봄에는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해 겨울에 탄핵을 받아 삭직되어 무주로 귀양 갔다. 7년간의 귀양 생활을 마치고 1425년(세종 7)에 서울로 돌아왔다. 손녀가 왕자와 결혼하게 되자 고신(告身)을 환수받았다. 시호는 제정(齊靖)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평산 신씨 제정공파 파조가 된 신효창의 묘, 언덕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하여 앞쪽은 급격한 경사이나 전망은 탁 트인 곳이다. 장인 김사형의 묘와 마찬가지로 방형의 봉분에 3단 호석을 쌓아올린 모습이다. 정면 상석과 좌우 망주석, 그 앞으로는 장명등을 세웠으며 좌우로 문석인이 시립한 배열이다. 다만 뒤쪽 장인 김사형 묘의 장명등은 고려풍인데 비하여 앞쪽 사위 묘 앞 장병등은 전형적인 조선풍 석등이다.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을 시조로 하는 평산 신씨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의 여말선초(麗末鮮初)를 겪어낸 신효창은 태조 이성계 재위 시에 벼슬에 나아가 도총제로부터 병, 호부를 역임하였다. 최종 벼슬명은 병조판서로 하고 사후 좌의정에 증직되어 증좌의정(贈左議政)이 됨으로서 양평 구정승골 2번째 정승으로 불리는 것이다.
신효창 묘 앞에서 세워진 묘비.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행자헌대부병조판서시제정신공묘갈명(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行資憲大夫兵曹判書諡濟靖申公墓碣銘)
신효창은 태조 이성계가 왕자의 난을 일으켜 3대 임금으로 즉위한 태종 이방원을 멀리하고 고향 함흥으로 북행(北行)을 떠날 때 호종하였다. 이때 일어난 조사의의 난에 태조가 연루되어 귀양을 떠나기도 했다. 친손녀(3남의 딸)가 세종의 5남 광평대군과 외손녀가 4남 임영대군과 혼인하였으며 2남의 딸은 양녕대군의 아들 순성군과 2남의 손녀는 세종의 아들 영해군과 혼인을 하는 등 세종과는 두터운 혼맥으로 인연을 맺었으며 이에 따라 고신(告身)을 환수 받았다고 한다.
산 아래에 있는 재실 신추당(愼追堂). 제정공 신효창과 현손까지 15위의 묘역과 향사관리를 하며 국무총리 신현확, 내무장관 신현돈이 후손이다.
또한, 영의정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외손이며 인조의 장인 한준겸(韓浚謙)과 의병장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 등이 모두 외손이니 그 후손들이 대단한 명문가(名門家)임을 알 수 있다.
재실 앞으로는 신도비 3개를 정비하여 세웠는데 왼쪽 2개는 신효창, 오른쪽은 3남 신자수의 신도비이다.
특히 흥미로운 일은 신효창이 장인 김사형의 병(病)을 낫게 하기위해 처남의 시신을 불태운 사건이 있었는데 태종이 이를 용서하였다는 기록이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 총제(摠制) 신효창(申孝昌)의 죄를 청하였으나 용서하였다. 신효창은 김사형(金士衡)의 사위이다. 김사형의 아들 김육(金陸)과 그 아내 곽씨(郭氏)가 모두 먼저 죽었는데, 사형의 병(病)이 위독하니 무당[巫覡]들이 모두 말하기를, ‘육(陸)의 부처(夫妻)가 탓이 되었다.’고 하였다. 신효창이 그 말에 혹(惑)하여 마침내 육(陸)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불태워 버렸다. 사헌부에서 신효창을 탄핵하여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라 하여 특별히 용서하였다. [태종실록]

이는 공신(功臣)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인의 병을 낫게하려는 효(孝)를 높이 평가한 처사가 아닌가 생각된다.
신추당(愼追堂) 근처에 서 있는 신효창의 장인 좌정승 김사형의 신도비
장인 김사형과 사위 신효창의 묘역과 재실 등을 둘러보고 나오려니 동구 밖 큰길에 비각이 하나 서 있다. 좌정승 김사형의 신도비이다. 양평 구정승골을 돌아보면서 첫번째 만난 장인과 사위 이야기가 정겹고 흥미롭다. 역사는 흘러갔지만 이야기는 남았으니 안동 김씨 문중과 평산 신씨 문중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오래도록 이어가기 바란다.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조선일보 조선닷컴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