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4.17 13:40

4월에 들어섰음에도 찬바람이 거세다. 3월에 20도를 넘나들던 날씨가 제정신 차리고 보니 이건 아닌데 싶었나 보다. 찬바람이 옷 속을 파고든다. 오늘 아니면 내일, 내일 아니면 모레 나서도 될 일을 굳이 오늘 찬바람 속에 나서는 것은 급한 성질 탓이다. 두릅이 뭐라고, 그 두릅을 사겠다고 나뭇가지 사이에서 바람 소리가 윙윙대는데 버스를 기다린다.

사실 어제 아파트 옥상 상자 텃밭의 두릅을 먹었다. 더웠던 날씨 탓에 잎이 먼저 퍼드러지고 말아 서둘러 땄다. 가시에 찔리며 따다 삶았더니 한 줌이다. 유난히 두릅을 좋아하는 식구들이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양이다. 입맛만 버려놓았으니 어쩌겠는가. 오늘은 푸짐히 사다가 실컷 먹일밖에. 습관 중 하나가 비싼 것일수록 푸짐히 산다. 조금씩 사서 먹어봐야 입맛만 다시다 만다. 그럴 바에야 한 번을 먹어도 질릴 때까지 먹자는 나만의 논리다.

봄의 맛은 찰나의 맛이다. 요즘이야 비닐하우스가 있어서 나물도 덩달아 사시사철 먹을 수가 있지만, 제철에 먹는 나물 맛에 비길 수가 없다. 하우스 나물은 싱겁다. 제철에 산야(山野)에서 나오는 나물이라야 입안에 쌉싸름한 제맛을 낸다. 그것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찰나며 순간이다. 순이 오를 때만 잠시 먹을 수 있는 나물들. 달래며 씀바귀며 취나물에서 두릅까지, 먹고 죽지 않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나 봄이면 움트는 순을 나물로 즐길 수 있다.

자연히 봄철에 순 나물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계절의 변화는 몸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겨울과 봄 사이, 환절기가 되면 인체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긴 겨울 그 에너지를 소비했으니 체력은 달리고 입맛은 달아난다. 이때 쌉싸름한 순 나물이 입맛을 돌게 해 주는 명약(名藥) 중의 명약(名藥)이다. 그중에서 으뜸은 두릅이다. 살짝 데쳐 초장에 찍어 먹으면 백 리 밖으로 달았던 입맛이 저절로 돌아온다. 사람에 따라 옻 순이나 오가피 순도 있지만, 우리 식구는 두릅을 최고로 친다.

초장에 찍어 먹는 두릅의 맛도 즐기지만, 그것보다는 두릅 라면을 만들어 먹는 것을 최고로 친다. 요즘은 두릅을 라면 끓일 때 넣기도 하지만, 시작은 두릅 데친 물의 재활용이었다. 두릅에 들어있는 성분 중 하나가 아스파라긴산이다. 아스파라긴산은 흔히 먹는 콩나물에 듬뿍 들어있다. 바로 감칠맛과 시원한 맛을 내는 아미노산의 일종이다. 당연히 두릅 데친 물로 라면을 끓이면 이 아스파라긴산 덕에 느끼한 기름 맛은 사라지고 시원하고 깔끔한 맛의 라면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여기에 청양고추라도 송송 썰어 넣으면 라면 맛은 배가 된다. 술이라도 한잔한 날 아침이면 해장국으로도 손색없다.

이런 생각에 군침이 돌 때쯤, 경동시장에 들어섰다. 나물 골목에서 어디를 둘러봐도 봄나물 천지다.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아 낯선 방풍나물의 고운 자태가 눈에 들어온다. 언제 봐도 곱다면서도 고개를 돌리니 뿌리가 실한 냉이가 눈에 들어온다. 살까? 말까? 망설이다 오늘은 두릅만 사기로 마음을 다진다. 두릅은 한 근에 만 원이다. 좀 더 싼 곳이 있나 둘러보다가 500g에 만 원이라는 집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얼른 두 근을 사 들고 돌아섰다.

슬그머니 장바구니 속에 손을 넣고 두릅 잎을 조금 뜯어 입에 넣는다. 쓴맛이 혀끝에 감기며 퍼져 나간다. 쓰면서도 뱉어버리지 않을 만큼 아주 미묘한 쓴맛이다. 쓴맛은 독이 있다는 증거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쓴맛이 나는 것은 먹지 않는다. 같은 동물인 인간만이 그 쓴맛을 즐긴다. 커피나 인삼도 쓰지만, 인간은 잘도 먹는다.

인간 중에서도 대부분 어른만이 쓴맛을 즐긴다. 맛의 깊이로 보면 단맛은 얕고 쓴맛은 깊다. 당연히 세상사 다 겪은 어른의 맛이다. 그래서 아이보다 어른이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나도 어렸을 때는 쓴 나물 종류를 먹지 않았다. 요즘 들어서 점점 쓴 나물이 좋아지는 걸 보면 이제 어른이 되어가는 모양이다. 인생의 쓴맛을 좀 알기는 알게 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