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번에도 권오준 포스코 회장 이름은 없네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미국·러시아·인도네시아·중국·베트남·UAE 등 총 여섯 차례 해외 순방에서 국내 6위 대기업인 포스코 회장은 한 번도 끼지 못했다. 재계에서는 "청와대에서 권 회장에게 물러나라는 시그널을 보내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또 검찰의 포스코건설 송도 사옥 헐값 매각 의혹 수사와 해외 개발 특혜 의혹 수사, 국세청의 포스코건설 특별 세무조사 등 현재 포스코를 향해 있는 사정 기관의 칼끝은 한두 개가 아니다. 권 회장은 지난 17일 측근들에게 미리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나와 전(前) 정권을 연결지으려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18일 포스코는 "권 회장이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사퇴한다"고 밝혔지만 재계에서는 이런 다양한 시그널이 작용한 결과로 보고 있다. 한 재계 인사는 "포스코는 국민연금이 단일 최대 주주(10.8%)이기는 하지만 외국인 주주가 57%에 달하는 순수 민간 기업"이라며 "박근혜 정부의 민간 기업에 대한 부당한 정치권력 행사를 문제 삼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여전히 포스코는 권력에 휘둘리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연임에 성공한 권 회장의 임기는 2020년 3월까지였다.
◇임기 2년 남기고 돌연 사퇴
포스코 안팎에서는 '여러 가지 압박이 있었고, 늘 비슷하게 비교되던 KT 황창규 회장의 경찰 소환 조사 등을 보면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검찰 수사가 포스코를 향하는 것이 가장 큰 부담이 됐을 것' 등 해석이 분분했다.
권 회장 사퇴설은 지난해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부터 끊이지 않고 나왔다. 박근혜 정부 시절 임명됐고,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또 대통령의 여섯 차례 해외 순방에 단 한 차례도 포함되지 않자 '권오준 배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권 회장 측근은 "사실 그런 것이 노골적인 압박"이라며 "권 회장 입장에서는 '내가 뭘 잘못해서 우리 회사가 이렇게 공개 망신당할까'라는 생각이 들고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권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퇴 선언은 포스코의 경영 실적이 크게 개선된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내부에서도 충격을 받은 분위기다. 권 회장 취임 전 포스코는 7조원 넘던 영업이익이 2조원대 중반까지 떨어지는 등 최악의 경영 위기였다. 권 회장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 작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덕분에 지난해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62% 증가한 4조6000억원을 기록했고, 최근 주가도 1년 전에 비해 40% 가까이 올랐다.
◇모든 회장이 마지막 임기 못 채워
권 회장이 중도 사퇴함에 따라 50년 포스코 역사에서 임기를 제대로 마친 회장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그래픽 참조〉.
권 회장 이전 7명의 회장은 모두 정치권력과의 갈등, 검찰 수사 등으로 중도 퇴진했다. 국영기업으로 출범한 포스코는 2000년 9월 정부 지분을 전량 매각하면서 민영화됐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회장이 중도 하차했다. 회장 임기 중에 정권이 바뀌면서 ‘포스코 회장 연임→새 정부 출범→포스코 회장 중도 퇴진’이 공식처럼 이어져 오고 있다.
전임 정준양 포스코 회장도 권 회장과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정 전 회장은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 국빈 만찬과 10대 그룹 총수 청와대 오찬, 베트남 순방 경제사절단 등 대통령이 참석한 주요 행사에서 배제됐다. 또 국세청이 서울 포스코센터, 포항 본사, 광양제철소 등에 대해 동시 다발적으로 세무조사를 착수했다. 결국 그는 임기 1년4개월을 남겨두고 이사회에 사의를 표명했다. 그 후 배임 혐의 등으로 기소돼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포스코 창업 공신인 고 박태준 초대 회장도 24년 이상 장기 집권했으나 마지막 임기 때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중도 퇴진했다. ‘CEO 수난사’가 초대부터 8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권 회장은 지난달 31일 포스코 창립 50주년 기자간담회에서 ‘회장 사퇴 외압설’에 대해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지만 정도에 입각해 경영을 해나가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20일 만에 스스로 사의 표명했다.
◇철강업계 “문로남불”
포스코는 다음 주 CEO 승계 카운슬 1차 회의를 열어 CEO 선임 절차와 구체적인 방법을 결정할 계획이다. 김주현 이사회 의장 등 5명의 사외이사와 현 CEO인 권 회장 등 6명으로 구성된 ‘CEO 승계 카운슬’은 사내외 인사들을 후임 회장 후보로 이사회에 제안한다.
권 회장 후임으로는 오인환(철강1부문장)·장인화(철강2부문장) 등 현 포스코 사장과 현 정부와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박기홍 포스코에너지 사장, 부산 출신인 최정우 포스코켐텍 사장, 황은연 포스코인재창조원 고문, 강태영 포스코경영연구원 전문위원 등이 거론되고 있다. 제3의 외부 인물이 선출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역대 회장 중 김만제 전 회장만 외부 출신이고 낙하산 논란이 일 수 있기 때문에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이날 권 회장의 사의 표명이 알려지자 철강업계에서는 “문재인 정부에서도 자기 맘에 안 들면 무조건 찍어 내리는 등 적폐라고 했던 예전 정권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며 “문로남불(문재인 정부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냐”는 말이 나왔다. 한 철강업계 고위 임원은 “철강업계의 큰 형이라고 할 만한 국내 1위 철강 회사 포스코 회장이 매번 외압으로 사퇴하는 것 같아 정말 안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