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장에서 직접 버선 빨래하던 톱스타… 벌써 그립네요"

영화배우 신성일·엄앵란 부부는 지난 16일 타계한 배우 최은희를 누구보다 또렷하게 기억한다. 신성일은 최은희·신상옥 부부에게 발탁돼 영화배우가 됐고, 엄앵란은 학창 시절부터 최은희 영화를 보며 배우의 꿈을 품었다. 두 사람은 "최은희가 떠난 것을 보면서 한 시대가 저무는 걸 느낀다"고 했다. 이들과 '최은희'를 주제로 각각 인터뷰해 회고문으로 재구성했다.  /송혜진 기자

"하늘같은 스승님의 부인과 어떻게 키스신을 할 수 있었겠나"

 

최은희 여사를 처음 본 건 1959년 8월 신필름 신인배우 오디션 현장에서다. 공군 조종사였던 형 옷장에서 빨간색 티셔츠를 훔쳐 입고 갔다. 지원자가 2600명 넘게 왔다. 내게 어떤 깡마른 남자(알고보니 이형표 기술감독이었다)가 대뜸 "너 신상옥 감독 얼굴을 아느냐"고 했다. 모른다고 했더니 "최은희는 아느냐"고 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영화 '마음의 고향'을 보고 최은희를 정말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쪽지를 하나 써주더니 "최은희 여사 옆 장발한 분이 신상옥 감독님이다. 그분에게 가봐라"라고 했다. 그렇게 신 감독님을 만났다. 감독님은 날 훑어보더니 "너, 나하고 3년 동안 고생할래?" 했다. 2600대1 오디션에 합격한 것이다. 신필름 막내 식구가 됐다. 신 감독과 최은희 여사는 내게 예명(본명 강신영)도 지어줬다. '넘버원 스타'라는 뜻의 성일(星一)이다. 신 감독 성을 따서 '신성일'이었다. 나는 꿈에 부풀었다.

신필름은 당시 시네마스코프 총천연색 영화에 온힘을 쏟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내가 최은희 여사 상대역을 하고 싶었지만 나이 차이도 많이 났고 연기도 달렸다. 신 감독님은 "밸런스가 안 맞는다"고 했다. 영화 '성춘향' 이몽룡 역도 김진규씨가 했다. 이후 '로맨스 빠빠'를 찍었다. 최은희 여사·김진규·남궁원·엄앵란이 나왔고, 나는 막내아들 역할이었다. '백사부인'을 찍을 땐 '테스트'도 당했다. 신 감독이 날 불러 최은희 여사와 키스신을 찍게 한 것이다. '하늘 같은 스승님의 부인'이라는 생각에 입술을 갖다 대지도 못했다. 신 감독님은 나에게 "성일아, 너 연애는 해봤냐? 나이 먹은 여자와 연애해 봐"라고 했다. 최은희 여사는 내게 그만큼 대단한 배우였다. 지금도 그렇다. 신 감독님은 배우 신성일을 만들어준 분이다. 그분의 부인이었던 최은희 여사 얘기를 내가 쉽게 입에 올릴 수 없다. 기자들이 빈소에서 내게 "소감 한마디 들려달라"고 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함부로 짧게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성일·배우

"눈 맞추기도 어렵던 선생님… '여배우로 사는 게 쉽지 않다'며 격려"

 

삼십 대 후반 무렵 미국 LA에서 열리는 영화 행사에 최은희 선생님과 함께 한국 대표 자격으로 간 적이 있다. 말이 영화배우이지 나는 아이 낳고 살림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을 때였다. 모처럼 외국에 가게 돼 설레기 그지없었다. 공항서 만난 선생님은 평소와 다름없이 우아하고 멋졌다. LA에서도 줄곧 품위 넘치는 모습이었다. 행사 끝날 때쯤에야 알았다. 최은희 선생님이 신상옥 감독님과 이혼 도장을 찍었다는 사실을.

행사 마치고 선생님이 말했다. "앵란아. 너 별일 없으면 나랑 여기서 좀 놀다 가자." 냉큼 "그럼요" 했다. 한 달쯤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뚜껑 없는 자동차 타고 드넓은 장미 농장 가서 꽃향기도 실컷 맡았다. 선생님은 나를 "앵란 언니"라고 부를 만큼 농담도 잘하고 속내도 드러냈다. 여행 마칠 때쯤엔 "여배우로 사는 게 쉽지 않아, 그렇지?" 하셨다. 괜히 목이 메었다. "맞아요. 그렇지만 선생님은 계속 멋질 거예요." 최 선생님은 "고맙다" 하고 싱긋 웃었다.

 

여배우는 겉보기만 화려할 때가 많다. 1960년대 영화 환경은 무척 열악했다. 의상 준비도 배우가 혼자 했다. 버선 하나 옆에서 빨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최은희 선생님은 그 모든 걸 혼자서 다 해냈다. 그만큼 욕심도 많았다. 영화예술학교도 최고로 만들고 싶어 했고, 주변 사람도 살뜰하게 챙겼다. 그런 선생님이 너무 대단해 보여 눈도 못 마주칠 때도 있었다. 최 선생님이 내게 이랬다. "앵란아. 내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고 대사를 읊어. 배우는 그래야 돼." 그때 배우는 눈빛으로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연기를 시작할 때부터 최은희 선생님은 내 우상이었다. 그를 보며 배우를 꿈꿨고 그의 영화를 빠짐없이 챙겨 보며 연기를 익혔다. 그가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내려앉는다. 한달음에 빈소로 달려가고 싶지만 다리를 크게 다쳐 그럴 수 없는 게 한스럽다. 이 말만은 하고 싶다. "천국에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세요. 고생만 하지 마시고 모든 꿈 다 펼치세요. 벌써 보고 싶습니다."  /엄앵란·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