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정부 요직에 임명된 한 인사에 대해 갖가지 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맞서 그가 국회의원 시절 ‘평균 이하’ 도덕성을 보였는지 따져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고개가 갸웃해졌다. 평균이란 나누는 분모가 있어야 할진대, 과연 도덕성은 어떤 분모로 나눠질까?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직책이니만큼 국회의원을 분모로 하는 평균일까, 아니면 국민이 분모일까? 결국 그는 낙마하고 말았지만, 과연 도덕성의 평균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 어디쯤 와있을까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숫자로 가늠하지 못하는 도덕성에도 평균이 들먹여지니, 통계가 나오는 데선 말할 나위 없다. 그저 평균을 산출해 간단명료하게 부각하면 그만이기에 십상이다. 평균 외 디테일은 묻혀버리면서 다시금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기 일쑤다. 최근 한 은행이 내놓은 ‘2018 보통사람 금융생활 보고서’를 봤을 때도 그랬다. 보통사람의 월평균 근로·사업 소득은 285만원, 부동산·금융·기타소득까지 더한 가구당 월평균 총소득은 438만원이었다. 20대는 251만원, 30대 417만원, 40대 501만원, 60대 517만원으로 늘어났다. 내 나이 대에선 월 5백은 들어와야 평균이란 건데, 우리 집은 한참 미달이네. 다들 이렇게 수입이 좋은가?
일상생활에서 점점 더 중시되는 미세먼지 농도의 평균에서도 고개가 갸웃해질 때가 있다. 얼마 전 잠실에서 열리기로 한 프로야구 경기가 취소된 날, 미세먼지나 초미세먼지 농도의 평균은 ‘보통’을 기록했다. 기록상으로는 미세먼지 탓에 사상 처음 경기가 취소돼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시시각각 농도가 달라지는 데다, 사람 활동이 거의 없는 한밤중과 이른 새벽 수치까지 넣고 나눈 하루 24시간 평균이었다는 점이다. 실제 활동시간대의 ‘체감 농도’와는 차이가 클 수밖에 없었다.
‘평균의 종말’
‘평균’은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평소 “비교는 불행의 시작”이라던 나의 소신을 일순간 밀어내고 비교선상에 서게 한다. 하기야 앞의 보고서는 아예 비교가 목적으로 보인다. 최고치와 최저치의 차이가 극단적으로 벌어지는 경우의 평균일수록 비교의 힘을 세게 발휘하는 것 같다. 평균 미달이라는 자괴감 내지 박탈감이 더 커지도록 몰아간다. 예를 들어 노후자금으로 7억~10억, 심지어 20억이 필요하다는 평균에 얼마나 많은 실버세대가 휘둘려지는지. 각자 처지와 씀씀이에 따라 필요 액수는 천차만별일 텐데 말이다.
최고와 최저가 크게 차이 날 때는 백분위 가운데 50%인 중앙값과 25%인 사분위수, 75%, 그리고 특히 막대그래프가 전체를 더 잘 드러낸다고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매체가 평균으로 비교하기를 즐긴다. 덩달아 나도 평균에서 넣고 빼기에 몰두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평균의 종횡무진 활약상은 인터넷 신조어만 봐도 알 수 있다. 평균이라는 ‘평타취’, 그 이상이라는 ‘상타취’, 이하는 ‘하타취’, 나아가 ‘평상타취’니 ‘평하타취’ 등으로 변주를 보인다. 암호처럼 ‘ㅍㅌㅊ(평타취)’, ‘ㅍㅅㅌㅊ(평상타취)’ 식으로 쓰이는 건 보통이다.
평균의 이상한 힘은 비교에 앞서 모든 곳에 그 잣대를 들이대고 싶게 만드는 데 있는 것 같다. 이제는 과거처럼 명문대학에서 인기 학과를 전공하고 대기업에 가면 안정된 삶을 이룬다는 평균 공식이 적용되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데도 그렇다. 며칠 전 교보문고에서 펼쳐본 신간 ‘평균의 종말’은 단 하나의 잣대를 들이대도 사람들이 의심 없이 진리처럼 여기는 ‘평균의 신화’를 반박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교육신경과학자이자 미국 하버드대 교육대학원 교수인 저자 토드 로즈는 ‘노르마’는 없다고 말한다.
‘노르마’는 수천 건의 자료로 평균을 산출해 만든 여성 전신상, 미국 여성의 정상 체격을 판단하는 평균이었다. 1945년, ‘노르마’와 가장 신체지수가 가까운 여성을 뽑는 대회가 열렸으나 예상과는 달리 평균적인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 공군은 1940년대 전투기 추락 사고가 빈번해지자 평균에 맞춘 조종사 좌석은 누구에게도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절 가능한 좌석을 개발했다고 한다. 저자는 산업화시대에 유효했던 평균주의는 이제 수명을 다했으니 평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개개인의 특성에 눈을 떠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름다움과 행복을 없애
이보다 무려 한 세기 이상을 앞서 평균의 함정에 우리의 행복이 빠질 수 있음을 지적한 예지의 작가가 있다.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다. 1909년 쓰기 시작한 그의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다. 내용도, 문장도 길고 난해해서 독서모임이 아니었더라면 읽어낼 엄두를 내지 못했을 작품이다. 총 6권 가운데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편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아름다움과 행복을 우리 마음에 들었던 여러 다른 얼굴들이나 우리가 체험했던 갖가지 기쁨들 사이에서 일종의 평균치를 형성하는 관습적인 표본으로 대체함으로써 무기력하고도 무미건조하며 추상적인 이미지만을 간직한다. …그래서 우리는 삶에 대해 비관적인 판단을 하며, 이 판단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아름다움과 행복을 충분히 고려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아름다움과 행복을 없애고 이에 관해 단 하나의 분자도 들어 있지 않은 종합적인 사실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꽃핀 이 아름다운 봄날, 내 다짐도 조용히 피어난다. ‘ㅍㅌㅊ’ 좋아하기, 이젠 멈춰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