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운동·음란물 등 대상 다양… 비용·시간 제약 적어 쉽게 중독돼 자제 안 되고 금단 증상 있으면 病, 쾌락 중추 기능 문제… 치료받아야
주부 정모(63·서울 은평구)씨는 요리를 하다가도, 화장실에 앉아서도,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있을 때에도 스마트폰 게임을 한다. 자려고 스마트폰을 꺼도 천장이 게임 화면처럼 보일 정도로 게임에 빠져 있다. 최근에는 지하철에서 게임을 하다가 친구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를 지나쳐버리거나, 반찬을 만들던 중이라는 걸 잊어버려 음식을 태우는 일이 잦아졌다.
중소기업의 임원인 강모(55·서울 동작구)씨는 상담 기관을 알아보고 있다. 2년 전 쯤 "스마트폰으로 야한 동영상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친구의 말에 솔깃해 처음 음란물을 접한 후로, 지금은 시도 때도 없이 동영상 앱을 켜서 음란물을 찾아본다. '누군가가 이런 내 모습을 보지 않을까'하는 불안감과 자책감 때문에 생활하는 게 힘들어지면서 중독 치료를 받기로 결정했다.
◇SNS·검색 등에 집착하는 중년 많아
우리나라 국민 여덟 명 중 한 명은 무언가에 중독돼 있다(한국중독정신의학회 추산). IT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기기나 프로그램 등이 개발되면서 중독의 대상이 많아져, 중독 인구는 더 늘 것이라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뇌가 성숙한 중년은 쉽게 중독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중년의 중독자(中毒者)가 늘고 있는 추세다. 총신대 중독재활상담학과 조현섭 교수(한국중독심리학회장)는 "중장년층의 스마트폰 이용률이 늘면서 스마트폰을 이용한 쇼핑, SNS, 게임 등에 중독되는 중년층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한국정보화진흥원에서 실시한 스마트폰 과의존 실태 조사에 의하면 스마트폰에 과의존하는 60대가 2016년엔 11.7%였는데 지난해에는 12.9%로 증가했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여러 행위 중에서도 중년층은 메신저·뉴스 검색을 하는 데 주로 빠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술·담배뿐 아니라 운동·게임·SNS 등 중독을 유발하는 것이 다양하다. 외로움, 결핍을 느끼거나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중년은 주의해야 한다. /신지호 헬스조선 기자
◇외로움·결핍이 중년 중독의 원인
중년이 돼서야 무언가에 빠지는 이유는 뭘까. 자식을 독립시킨 주부, 직장에서 입지가 좁아졌거나 은퇴한 직장인, 혼자 사는 노인 등 외로움·결핍을 느끼는 사람이 주로 중독에 취약하다. 한양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노성원 교수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일명 얼리어답터 같은 기질의 사람도 쉽게 중독된다"고 말했다.
조현섭 교수는 "나이가 들면 상대적으로 구매력이 높아지고 여가 시간이 많아져서, 취미로 시작했다가 그 대상에 적극적으로 시간·돈·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중독으로까지 이어진다"고 했다.
◇운동할 때도 도파민 분비돼 중독 가능
중년이 중독에 빠지는 대상은 다양하다. 청소년·젊은 층에 비해 금전적·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다양한 분야를 제약 없이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중독 때문에 상담 받는 중년의 경우 알코올뿐 아니라 SNS, 쇼핑, 등산, 테니스, 게임, 음란물 등 중독되는 대상이 다양한 특징을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 정신의학계는 술·담배 같은 중독성 물질이 아니어도 특정 행위가 중독을 유발할 수 있다고 공식 인정한 바 있다. 특정 행동을 할 때 즐거움을 느껴 뇌에서 도파민(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물질)이 분비되면, 이 도파민이 충동을 조절하는 뇌의 전두엽을 자극한다. 전두엽이 지속적으로 자극받으면 충동 조절 기능이 약해져서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중독에 빠지게 된다.
◇의지만으로 치료 불가능
자신이 중독됐다는 걸 알기란 쉽지 않다. 중독의 특징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중독되면 가장 먼저 '갈망'을 느낀다. 알코올 중독을 예로 들면, 가족이 술 마시는 것을 말리려고 집안의 술을 모두 버리면, 몰래 술을 사와서 숨겨두고 마실 정도로 욕구를 참지 못한다. 그러다가 원하는 상태가 될 때까지 술 마시는 양이 점점 늘어나는 '내성'을 겪는다. 어쩌다가 술을 못 마시면 손이 떨리거나, 환각이 보이는 등 '금단' 증상도 생긴다. 이런 세 가지 특징이 있을 때 중독됐다고 본다.
중독이 의심된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좋다.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다신 안 하겠다. 믿어보라"며 큰 소리를 치는 사람이 다시 술이나 도박에 쉽게 빠지는 이유도 대뇌의 쾌락 중추가 지속적인 자극 탓에 위축돼, 결국엔 그 기능이 떨어져 기억력과 판단력이 저하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약물치료나 상담치료 등으로 쾌락 중추를 대신 자극해 보상해야 한다. 중독을 치료하려는 의지가 있더라도, 뇌 기능이 이미 변한 상태에서는 의학적인 도움 없이 뇌를 원래의 상태로 돌리는 게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