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정현(62·홍익대 미대 교수)의 작업실은 10년간 경기도 고양시 덕은동의 얕은 산자락에 있었다. 이 일대가 주택개발예정지구에 포함되면서 2016년 이웃 사람들이 살던 집이 철거됐다. 굴착기가 육중한 삽날을 내던질 때마다 100년은 됐음 직한 한옥은 낱낱이 찢겼다. 철거된 폐목재의 단면은 깨진 유리보다 날카로웠다. 시간과 시련의 흔적이 온몸에 새겨진, 거칠고 예민해진 노인과 같았다. 정현은 쓸모도 없고 까칠하기만 한 이 폐목재를 소중하게 작업실로 실어 날랐다. 그는 "삶이 응축된 잔해물에서 날카로운 에너지의 돌출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에서 열리는 '정현'전에 선보인 작품은 하나같이 낡아서 버려진 것들로 만들어졌다. 침목, 아스콘(아스팔트 콘크리트), 잡석, 폐철근 등으로 해온 작업의 연장이다. 2016년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파리 루브르궁전 북쪽에 있는 팔레 루아얄 정원에서 조각전을 열었을 때 호평받은 침목 작품도 볼 수 있다.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올해의 작가'에 뽑혔을 때도 침목 작품이 나왔지만, 이번 작품은 2015년 새로 만든 것이다.
침목은 뾰족한 돌멩이 무더기에 찍힌 곰보 자국투성이다. 여기저기 패고 벗겨졌다. 그는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보며 자랐다. 장갑차와 곡물을 잔뜩 실은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땅은 푹 꺼지는 듯하다가 다시 솟아오르기를 반복했다. 정현은 "작가가 되자 기차의 엄청난 무게에 눌리고, 비바람에 시달리고, 자갈과 부딪혀 가며 10여 년을 견딘 침목이 생각났다"고 했다.
철거된 한옥의 폐목재로 만든 신작‘무제’. /금호미술관
2층 전시장에 있는 '무제'는 철거된 한옥에서 나온 폐목재를 포클레인으로 다시 부숴서 원통형으로 쌓은 것이다. 불로 그을린 뒤 먹을 칠해 까만색이다. 가시면류관 같기도 하고, 새 둥지 같기도 한 이 작품은 목재의 날카로운 절단면이 밖으로 향해 있어 다가가거나 건드리기 어렵다. 한옥으로 지어진 뒤 100여 년간 비바람을 견딘 후 철거되기까지, 고단한 삶을 살았던 나무는 이제 비로소 안식을 찾았다.
1층 전시장에 홀로 놓인 7m 넘는 대형 작품도 마찬가지. 경남 지역에 버려진 옛 향교의 대들보를 가져다가 재료로 썼다. 수백 년 동안 건물의 천장을 떠받쳤을 대들보는 흰개미에 좀이 먹었고, 단청은 낡고 바랬다. 여기에 먹을 칠한 나무 부재 셋을 수직으로 접붙였다. 제 임무를 다하고 힘없이 스러진 대들보에서 새로운 생명이 솟구치는 듯했다.
정현은 하찮은 재료의 가치를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깨우쳤다. 경매에서 낙찰받은 생선을 직접 손질할 정도로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다. 자신이 요리할 수 있는 최선의 재료를 찾아내는 재주를 수산시장에서 단련했을 것이다. 그는 "밴댕이처럼 하찮게 여겨지는 생선도 제철에 신선한 것을 고르면 맛있게 먹을 수 있다. 하찮은 재료도 작가의 뜻에만 맞으면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수산시장에서 얻었다"고 했다. "재료가 좋으면 작품은 오히려 약해질 때도 있어요. 생각이나 상상의 여지를 줄이고 이야기를 방해할 수 있거든요. 제가 꽂힌 재료들은 낡고 버려졌지만 한때는 인간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살았던 것들이에요. 그래서 '혹독한 시간 잘 견뎠다, 그래서 이렇게 단단하구나' 하고 칭찬부터 해줘요." 5월 22일까지. (02)720-5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