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4.28 03:01 | 수정 : 2018.04.28 04:07

도읍에는 국가 통치 철학 깃들어… 宋의 카이펑은 통행금지 없애
淸황제, 통합 위해 明태조릉 참배… 베이징은 中華 부활 위한 도시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지음 | 메디치 | 524쪽 | 1만8000원

중국에서 숱한 왕조가 명멸할 때마다 도읍지가 건설되고 사라졌다. 그중 이 책에 소개된 도시 6곳은 역대 중국 왕조의 수도로 가장 많이 사랑받았다. 시황제의 아방궁과 병마용 갱으로 유명한 시안(西安·옛 장안)은 최고 인기 도읍지였다. 주(周), 진(秦), 한(漢), 수(隋), 당(唐) 등 13 왕조가 이곳에 황궁을 세웠으며 그 햇수를 모두 합치면 1129년이나 된다. 시안은 '중국의 정체성이 빚어진 곳'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은 중화제국의 부활을 준비하는 도시다. 저자는 집권 2기를 시작한 시진핑 주석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중국인이 꾸어야 할 꿈, 중국몽(中國夢)으로 제시하며 이 도시에서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새판짜기를 시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 손에 공자, 한 손엔 황제' 등을 통해 중국 역사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소개해 온 저자가 이번에는 중국 역대 왕조의 도읍지였던 시안,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항저우(杭州), 난징(南京), 베이징을 매개 삼아 3000년 중국 역사 이야기를 들려준다.

도읍에는 국가의 통치 철학이 깃든다. 당의 수도 장안(長安)은 동시대의 콘스탄티노플보다 7배나 큰 첨단 계획도시였고 실크로드로 서역과 연결돼 온갖 외국인으로 북적대던 국제도시였지만 공간 구조는 폐쇄적이기 이를 데 없었다. 주민은 2m 높이 담장으로 둘러싸인 108개의 격자형 방(坊)에 모여 집을 짓고 살았는데, 저녁 북소리와 함께 방의 출입문이 닫히면 통행금지가 실시됐다. 반면 송(宋)의 수도 카이펑엔 방도, 방을 둘러싼 담도 없었다. 상업구역이 엄격히 지정된 창안과 달리 카이펑에선 아무 데서나 가게를 열 수 있었다. 점포 수는 6400개를 넘었으며, 통행금지가 없어 오늘날의 24시간 편의점처럼 온종일 물건을 사고팔 수 있었다. 인구 밀도가 당시의 파리보다 2~3배 높았고, 주택 과밀로 화재 위험이 커지자 중국 최초의 소방서인 군순포(軍巡鋪)가 설치됐다. 당이 통치의 효율성을 추구한 반면, 송은 경제활동의 자유를 통한 부(富)의 증대를 지향했고 그것이 도시 설계에 반영됐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송대(宋代) 카이펑을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규제 없는 도시였던 카이펑은 당시 세계국민총생산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송대(宋代) 카이펑을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규제 없는 도시였던 카이펑은 당시 세계국민총생산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메디치
명(明) 태조 주원장은 사후 난징의 효릉에 묻혔다. 그런데 훗날 명 왕조를 무너뜨린 청(淸)의 황제들은 정성을 다해 효릉을 관리했다. 강희제는 효릉에 치륭당송비(治隆唐宋碑·명 태조가 당 태종이나 송 태조보다 나라를 잘 다스렸다는 뜻)를 세우고 평생 5번이나 참배했는데, 그때마다 신하로서 황제에게 행하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이는 소수민족 출신의 통치자로서 다수민족인 한족의 마음을 얻기 위해 행한 정치적 퍼포먼스였다. 베이징의 가장 큰 특징은 중국을 정복한 이민족 왕조들의 도읍지란 점이다. 요(거란), 금(여진), 원(몽골), 청(만주)이 모두 이곳을 수도로 택했다. 이민족 통치자들은 북쪽의 유목세계와 남쪽의 농경 세계가 만나는 경계인 베이징을 택함으로써 두 세계의 통합을 추구했다. 원(元)의 쿠빌라이는 이곳에 도읍하며 궁성을 남쪽에 두고 시장은 북쪽에 설치하며, 황궁 왼쪽에는 종묘, 오른쪽에는 사직을 두는 중국식 배치 구조를 그대로 따랐다. 이 역시 한족과의 통합을 염두에 둔 정치적 선택이었다.

이 밖에도 고금(古今)을 오가며 들려주는 도시 이야기가 풍부하다.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한 사건 '시안사변'은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국민당 정부에 토벌당할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인 평화공세의 결과란 점에서 오늘날 북핵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야 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책 읽는 내내 시진핑의 중국몽이 과연 실현될 수 있을지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중국이 야심 차게 추진 중인 현대판 실크로드인 일대일로(一帶一路)는 서방세계의 저조한 참여로 좌초 위기에 빠졌다. 중화사상에 근거한 '조공·책봉'식 세계질서가 자유와 인권, 국가 간 평등에 근거한 서구의 보편적 가치를 대체할 가능성도 크지 않아 보인다. 다만, 지정학적인 이유로 중국은 우리가 지피지기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에서 이 책을 주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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