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폐막한 뉴욕 트라이베카 영화제에서 '최우수 단편상'을 받은 러시아 출신의 레나르 카마로프 감독은 트로피 대신에 그림 두 점을 받았다. 영화제 측에서 트로피나 상패 대신에 미술계에서 최근 눈에 띄게 활약하는 작가의 작품을 주기로 한 것. 카마로프 감독이 받은 그림 한 점에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미소를 짓는 강아지가, 다른 한 점에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우뚝 서 있는 강아지가 있었다. 이 강아지의 이름은 '러브리스(Loveless)'.
사랑받지 못해 러브리스라 불리는 강아지 캐릭터가 세계 곳곳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 작가 강석현(38)이 자신이 키웠던 강아지를 그린 것이다.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간 뒤 뉴욕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을 졸업한 그는 아시아 대표 차세대 팝아티스트로 꼽힌다.
대만 미술평론가이자 큐레이터인 빅토리아 루(Victoria Lu·陸蓉之)가 2000년대 들어 아시아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팝아트의 한 흐름을 가리켜 2004년 '애니메믹스'(애니메이션과 코믹스의 합성어)라고 이름을 붙였다. 2008년부터 무라카미 다카시·이동기 등 유명 팝아트 작가들을 모았고, 거기에 신인이나 다름없는 강 작가를 포함해 아시아 각 도시에서 순회 전시를 기획했다. 이를 계기로 애니메믹스 대표 작가 대열에 들어선 그해 대만 타이베이와 중국 상하이에서도 첫 개인전을 열었다.
패션 브랜드 'MCM'은 2018년 컬래버레이션(협업) 작가로 강 작가를 선정했다. 마침 올해 '개의 해'이기도 했다. MCM 매장이 있는 LA, 뉴욕, 베를린, 홍콩, 방콕, 상하이, 서울 등 대도시에서 'Save the Loveless'라는 유기견 구호 캠페인이 벌어졌고, '러브리스' 작품이 전시됐다. 상하이, 타이베이, 도쿄, 뉴욕 등에서 개인전을 열어 해외에서 인지도가 높다는 것도 협업 작가로 선정된 이유였다. 해외에서는 '에디 강'이란 이름을 쓴다. 지난 27일 서울 청담동 MCM플래그십 스토어에서 트라이베카 영화제에 막 다녀온 강 작가를 만났다.
―왜 유기견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나.
"2003년 봄, 군대에서 휴가 나왔을 때 유기견 보호소에 갔다가 작고 하얀 몰티즈종 강아지를 봤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고, 곧 안락사를 당할 것이란 얘기를 듣고 고민 없이 집에 데려왔다. 애교는 찾아볼 수 없었고, 엄청나게 경계하고 난폭한 성향마저 보였다. 버림받은 주인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으면 저럴까 싶어 짠했다. 그래서 캐릭터 이름도 '러브리스'다. 우리 가족은 여가 대부분을 이 강아지와 보냈다. 심술 맞게 으르렁대던 강아지가 차츰 살갑게 굴기 시작했다."
―'러브리스'를 통해서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뭔가.
"러브리스는 2008년에 죽었다. 버림받았을 때 얻은 머리의 상처 때문에 오래 살진 못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작은 강아지와의 교감을 통해 많은 걸 느끼고 배웠다. 순수했던 존재가 버림을 받으며 극단으로 피폐해지는 모습에서부터, 감정이 가지는 신비한 힘, 사랑을 통해 회복되는 모습까지. 이렇듯 작은 짐승도 상처를 어루만져 줄 치유와 사랑이 필요한데 하물며 인간은 어떻겠나?"
강 작가의 작품을 보고서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란 생각이 든다면 아마 맞을 것이다. 옷, 가방, 화장품은 물론이고 백화점이나 카페 등 일상 공간에서 그의 작품을 한 번쯤 마주쳤을 확률이 크다. 최근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아티스트 중 하나로 꼽히는 그는 특히 '컬래버레이션의 귀재'다. 럭셔리 브랜드 폴 스미스, 화장품 브랜드 헤라, 남성복 브랜드 '시리즈', PC 브랜드 모뉴엘, LG스마트폰, 신세계백화점 등과 협업했다.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비결이 뭘까.
"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유치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꽤 많다. 유치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애니메믹스' 작가라고 불린다. 만화에 많이 영향을 받았나.
"만화뿐만 아니라 인형·로봇 등 어렸을 때 좋아했던 모든 게 영감이다. 여전히 장난감을 좋아하고 로봇 수집도 하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캐릭터는 갖고 놀던 장난감의 기억에서 비롯됐다. 경험, 그중에서도 유년기, 청소년기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을 한다. 초기 작에 자주 등장하는 빨간색 피에로는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나오는 광대 캐릭터다."
―그 캐릭터는 봉제 인형으로도 만들어졌다.
"유학 갔을 때 외로워서 바느질을 시작한 게 작품으로 이어졌다. 남자애가 바느질을 한다고 이상한 눈초리도 받았다. 바느질만큼 잡생각을 없애기 좋은 작업도 없다. 한 땀 한 땀 꿰맬 때마다 '착한 인형이 돼라' 주문을 외운다."
상업적인 협업만 해온 것은 아니다. 2012년 이어령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낸 책 '80초의 생각 나누기'의 삽화를 그렸다. 이 작업을 계기로 2014년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동화책 '눈 덮인 숲 속의 예티를 만나본 적 있나요?'를 냈다. 가장 최근에 한 협업은 딸과 함께한 것이다. 유치원에서 부모와 함께 그림을 그려오라는 숙제를 내줘 딸의 모습을 딴 캐릭터를 그렸다.
―전시, 브랜드 협업, 동화책 출간까지 멀티플레이어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내 이름으로 개인전을 여는 것, 동화책을 출간하는 것, 그리고 뮤직비디오를 만든 것. 캐릭터를 만들고 거기에 이야기를 담는 게 내가 하는 일이다 보니까 자연스레 동화책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딸아이가 생긴 뒤로 관심이 더 생겨서 앞으로도 만들고 싶다. 2013년엔 조PD 5집 수록곡 '비밀일기'의 뮤직비디오 작업을 했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섞인 영상이었는데 애니메이션 부분을 담당했다. 뮤직비디오를 잘 만들기로 유명한 가수라서 의뢰가 들어왔을 때 엄청 뿌듯했다. 목표는 다 이룬 셈이다(웃음)."
―밝고 긍정적인 작품을 주로 만드는데 캐릭터 중 로봇의 표정은 경직됐다.
"억압적이거나 폭력적인 것을 표현할 때 '로봇'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로봇은 대도시의 큰 건물과도 많이 닮았다. 사람들이 일하러 가는 건물이 입을 벌리고 사람을 집어삼키는 로봇처럼 보인다. 그 안에 들어가면 다들 남을 찍어 누르려고 하거나 경쟁에서 이기려고만 드는 것도 로봇과 비슷하다."
서울과 뉴욕이란 대도시에 산 작가는 이 도시들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를 봤다. 장난감과 유년시절 추억을 작품에 이용하는 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마음속 이정표를 세우기 위해서란다. "제 작품이 사람들 맘에서 악의(惡意)가 없던 시절, 단순하고 즐거웠던 시간을 떠올리는 이정표가 됐으면 합니다."
강석현 작가 프로필
1980 서울 출생
2003 미국 뉴욕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 졸업
2007~2015 대만 타이베이에서 첫 그룹전 후 서울, 상하이, 도쿄, 뉴욕, 홍콩 등에서 개인전
2009~2018 MCM·폴 스미스·코오롱·아모레퍼시픽·LG 등과 협업
2011 베네치아 비엔날레 위성 전시 ‘퓨처 패스’ 참여
2013 조PD ‘비밀일기’ 뮤직비디오 제작
2014 동화책 ‘눈 덮인 숲 속의 예티를 만나본 적 있나요?’ 출간
2018 트라이베카 영화제 ‘뛰어난 성취 보인 예술가’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