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5.10 14:45

양평 구정승골의 네 번째 이야기는 영의정 동고 이준경이다. 이준경(李浚慶, 1499년~1572년) 선생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서예가, 학자이며 자(字)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영의정을 지냈으며, 선조 묘정에 종사 되었다.

앞서 소개한 한음 이덕형과 같은 광주 이씨로 연산군에게 사사된 이세좌가 할아버지이며 세종대왕 영릉에 묫자리를 내준 이인손이 고조할아버지이다. 한음 이덕형은 이인손이 6대조가 되니 2대 차이가 난다.

동고 이준경의 묘, 정경부인 풍산김씨와 합장묘인데 한 단의 호석을 둘러 단아한 모습이다. 묘 앞으로는 상석과 향로석, 좌우에 망주석을 세웠고, 중앙으로는 사각의 장명등이 보인다. 그 앞으로는 좌우로 무석인이 시립하여 서 있는데 어쩐지 새것인지라 의아해서 물어보니 본래 세워져 있던 석인상이 얼마 전 도난당하여 새롭게 세웠다고 한다. 망자의 묘지에서 석인을 훔쳐가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그 석인을 어느 집 정원에 장식으로 세웠는지는 모르지만, 꿈자리가 편치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특이하기는 비록 영의정이라고는 하나 사대부 묘소에 무석인을 세운 것이 흔치 않은 일인데 무인의 모습도 어딘지 익숙지 않아 보여서 새삼 도난당한 원본의 모습이 궁금하였다.
이준경의 할아버지 이세좌와 아버지 이수정은 1504년(연산10) 갑자사화 때 참형 되었으며, 6살 어린 이준경과 형 윤경은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2년 후 중종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이후 외가에서 공부하며 자라 1522년(중종17)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31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홍문관 부수찬과 세자 시강원, 사헌부를 거쳐 승지가 되었으며 1543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한 후 한성부 우윤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이후 병조판서, 한성부 판윤을 거쳐 형조판서를 지내고 1558년 우의정, 1560년 좌의정, 1565년 영의정에 올랐다.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창빈 안씨의 아들 덕흥대원군의 3남 하성군을 옹립하니 선조 임금이다.
선생의 묘소 아래로는 장남 창수공 이예열과 장손(長孫), 손부(孫婦)의 묘가 차례로 이어져 있다.
기묘사화 때 피해 입은 사림파를 옹호하다가 파직이 되는가 하면 정적의 모함으로 유배를 떠나기도 했다. 원상(院相)으로 국사를 총괄하면서 을사사화 피해자나 기묘사화 때 사사된 조광조 등을 신원하였으며 문정왕후 사후 윤원형 일파 숙청에 앞장서는 등 올바른 정치에 진력하였고 성리학을 조선 정치이념으로 정착시키는데 노력하였다. 또 인재 등용에 공정함을 앞세우니 홍문관 후보로 올라온 자신의 아들을 스스로 삭제한 일화는 유명하다. 사후 선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청안 구계서원에 제향 되었다.
묘하 초입에는 선생과 3남 양호당 이덕열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3男 양호당은 사촌 이유경에게 양자를 보냈다.
임종 시 붕당(朋黨)을 경계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 율곡 이이 등이 비난하였으나 이후 조정이 심각한 당쟁에 휩싸이자 공의 탁월한 식견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유소(遺疏) 내용은 첫째, 제왕은 학문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둘째, 아랫사람에게 위의(威儀)가 있어야하며 셋째, 군자와 소인을 분간해야 하고 넷째, 사사로운 붕당(朋黨)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 등이다.
종로구 서울경찰청 인근에 있는 종침교(琮琛橋) 표석, 허종과 허침의 사연이 깃든 곳이다. 지금은 다리는 찾아볼 수 없으며 그 앞으로는 큰 교회가 하나 서 있는데 종교교회이다. 종교(宗敎)가 아니라 종교(琮橋)이니 종침교(琮琛橋)를 줄여서 부르는 것으로 최초 이 다리 옆에서 교회를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公의 할아버지 이세좌는 연산군 생모 윤비에게 사약을 전달하였다가 숙부 이극균과 함께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하였다. 원래는 허종(許琮)과 허침(許琛)이 그 전달 책임을 수행하게 되어있었으나 소식을 들은 누님이 대궐에 들어가면 안 된다면서 입궐하는 길에 다리에서 떨어져 다쳤다는 핑계를 대고 가지 말라 하여 그대로 실행하고 응하지 않았다. 이에 이극균과 이세좌가 그 임무를 대신하고 훗날 갑자사화 때 화를 당했다. 광주 이씨 문중이 이때 쑥대밭이 되었다가 훗날 이준경 선생이 영의정에 올랐으며 조금 더 지나 한음 이덕형 등으로 가문이 다시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의 고조할아버지가 되는 이인손의 묫자리가 원래 지금 세종대왕 영릉 자리였다. 그런데 애초 지금의 서초구 헌인릉 인릉자리에 초장을 했던 세종대왕의 능지가 험지라 하여 천장을 논하게 되었다. 이후 여주에 있던 이직(성주 이씨), 이계전(한산 이씨), 이인손(광주 이씨) 등 사대부의 묘를 이장하고 옮겨오니 지금의 여주 영릉(英陵)이다.
1450년, 향년 53세로 승하한 세종은 지금의 헌인릉 인릉자리 근처에 모셔졌으나 흉지라고 소문이 나서 천장하게 되니, 19년 뒤인 1469년에 지금의 여주 영릉으로 이장하였다. 이인손의 묫자리였다.
즉, 고조할아버지 이인손의 묫자리를 임금에게 내준 것이다. 처음 이곳에 이인손의 묘를 쓸 때 자손이 금시발복할 명당이나 다만 재실을 짓지 말고 하천에 다리를 놓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아들 다섯 극(克)자 항렬 형제들 극배(克培), 극감(克堪), 극증(克增), 극돈(克墩), 극균(克均)은 입신양명하게 되었지만, 지관이 짓지 말라고 당부한 재실과 다리를 놓는 바람에 세종의 능을 천장할 자리를 찾아다니던 관리들이 그 자리를 찾게 되어 결국 내주고 말았다고 또 그 때문에 갑자사화 때 광주이씨 문중이 참화를 겪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결국 이인손의 묘는 연을 날려 떨어지는 곳으로 이장하라는 말에 따라 지금의 세종 영릉 근처로 옮기니 그곳의 이름이 연이 날아가 떨어진 연주리(延注里) 또는 연하리(延下里)라고 부르는 곳이다.

양평 구정승골 아홉정승 중 앞서 소개한 한음 이덕형과 동고 이준경에 이어 이준경의 부친 증영의정 이수정이 있으니 구정승중 삼정승이 광주이씨 문중이다. 다만 이수정의 묘는 산을 타야 하는 험한 지형이라 답사하지 못하였다.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조선일보 조선닷컴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