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 광부의 아들, 칸의 별로 뜨다

독일에서 나고 자랐고 미국·영국에서 연기를 배웠다. 부모님은 파독 광부·간호사였다. 항상 "난 그래도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배우가 되길 꿈꿨지만 우리말이 많이 어눌했다. 아나운서 학원 새벽반을 다니며 한국어 발음을 입 아프도록 외웠고, 우리말을 더 빨리 익히려고 야채가게 점원으로 일했다.

"이모, 배추 한 단에 1200원!"을 목 쉬도록 외친 덕에 곧 "에누리는 눈곱만큼만 남기고 팔게요" 같은 말도 할 줄 알게 됐다. 올해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러시아 영화 '레토'(감독 키릴 세레브레니코프)의 주연 배우 유태오(37) 얘기다.

이 영화에서 그는 러시아의 고려인 출신 전설적 로커 빅토르 최(1962~1990)를 연기했다. 이전의 그는 '여배우들'(2009) 등 몇몇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한 것이 경력의 전부였다. 현지 언론 반응은 기대 이상이다.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는 "거만하면서도 순수하고, 무모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로커 빅토르 최의 매혹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썼다. '레토'는 잡지 '르 필름 프랑세즈'에서 평균 평점 2.93점(4점 만점)으로 13일(현지 시각) 현재 경쟁 부문 1위다. 칸이 주목한 배우 유태오를 지난달 서울, 지난 13일 프랑스 칸에서 연달아 만났다.

세레브레니코프 감독은 빅토르 최를 연기할 배우를 찾기 위해 전 세계 배우 2000여명의 프로필을 뒤졌고, 그중 600여명을 직접 만나 오디션을 봤다. 유태오를 보고 나서야 감독이 "이거네(This is it)"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태오는 "운이 좋았다"고 했다. "빅토르 음악에 서린 한(恨)을 표현하려면 한국인 배우여야 하고, 너무 유명해서 식상해도 안 되고, 영어도 잘해야 했어요. 젊은 시절 빅토르 역할이니 어려 보이는 구석도 있어야 했고요. 어쩌다 제가 그 조건에 다 맞았던 거죠(웃음)."

독일 중·고교 시절엔 농구 선수였다. 말런 브랜도와 제임스 딘을 보며 배우 꿈을 품었다.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연기 학교를 다녔고 영국 런던 로열 아카데미에서 셰익스피어 연극을 공부했다. 한국에 온 건 "기왕이면 제대로 한국인으로 살아보자"고 생각해서다.

"국적이 뭐든 남들 눈엔 전 결국 한국인이니까요.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외국에서 젊은 동양인 남자 배우 역할은 주방 보조나 안경 쓴 공붓벌레가 고작이었어요. 그게 주어진 한계라면 거꾸로 한국을 베이스캠프 삼아 세상으로 나가보자고 생각했죠." 현재 그는 한국 국적을 취득해 이중국적이다.

서울 이태원에서 4년째 살면서, 한국 배우를 찾는 태국·인도네시아·대만 등 외국 영화에 꾸준히 출연했다. '레토' 출연이 결정된 뒤엔 3주 만에 러시아어 대사와 빅토르 최 1집에 수록된 노래 9곡을 완벽히 외워야 했다. 모든 대사의 발음을 분·초 단위로 쪼개 호텔방 곳곳에 붙여놓고 혀에 쥐가 나도록 연습했다. 촬영 둘째 날엔 450명 관중 앞에서 공연하는 장면도 찍었다. 유태오는 "부담감에 짓눌려 터질 것 같은 전기밥솥이 된 듯한 나날이었다"고 했다.

한창 영화 촬영 중에 반정부 성향으로 푸틴 정부의 눈 밖에 났던 세레브레니코프 감독이 공금 횡령 혐의로 가택 연금 당했다. 감독은 칸 영화제에도 오지 못했다. 9일 열린 영화제 첫 공식 상영 때 유태오와 다른 배우들이 감독 이름을 적은 팻말을 들고 레드카펫 위에 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유태오는 "큰 영화제에 오게 됐다고 김칫국부터 마시진 않겠다. 야채가게 점원 할 때 마음을 잊지 않고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고 싶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감독님과 칸 영화제 온 기념으로 보드카 한잔했으면 좋았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