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5.15 03:10

[비상등 켜진 '제조업 코리아] [4] 한때 세계 1위의 눈물

"깔딱깔딱 숨 넘어가기 직전입니다. 산소호흡기 달고 겨우겨우 버팁니다."

지난 2일 오후 전북 군산국가산업단지 현대중공업 군산 조선소 인근에서 만난 A 협력업체 직원은 한숨을 깊게 내쉬며 말했다. A사는 한때 직원이 400여 명이었다. 지금은 축구장 수십 개 규모의 야적장이 텅 비었고, 회사 주차장에서는 차량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직원 10여 명이 6개월간 무급으로 일하며 버티는 중이다. 작년 7월 현대중공업이 건조할 선박이 없어 군산 조선소 가동을 중단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이후 10개월 협력업체 수십 곳이 문을 닫으면서 5000여 명이 일자리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지난 3일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내 선박 조립 시설인 독(Dock)이 텅 비어 있다.
텅 빈 군산의 한숨 - 지난 3일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내 선박 조립 시설인 독(Dock)이 텅 비어 있다. 현대중공업이 1조4000억원을 투입해 2009년부터 가동에 들어간 군산조선소는 매년 10척이 넘는 선박을 건조해 인도했지만 작년 7월 일감이 없어 잠정 폐쇄됐다.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 이외 대부분 조선사들이 채권단 자금 지원을 받을 만큼 한국 조선 생태계는 무너진 상태다. /주완중 기자
한국은 한때 세계 1위 조선 강국이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로 전 세계 무역이 위축되면서 조선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고유가 덕분에 해양 플랜트로 재미를 보던 것도 잠시, 2014년 유가가 급락하면서 해양 플랜트로 십수조원 적자를 본 한국 조선은 지금까지도 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10년간 중견·대형 조선사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29조원 이상을 쏟아부었지만 주먹구구식 구조조정 탓에 조선업 생태계만 망가뜨렸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협력업체 고사(枯死) 직전

군산 조선소 인근에선 공장 출입구를 닫은 채 경비원만 근무하거나 아예 공장 문을 닫은 곳도 쉽게 눈에 띄었다. '공장 매매' 현수막이 걸린 곳도 여러 곳이다. 한 경비원은 "일감이 없어 문 닫은 지 서너 달 됐다"며 "직원들도 모두 떠났다"고 말했다. 협력업체 채모 사장은 "선박 대신 건설 일감이라도 하나 나오면 죽기 살기로 경쟁하다 보니 턱도 없는 저가 수주로 이어지고 있다"며 "그마저도 가뭄에 콩 나듯 한다"고 했다.

2009년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독에서 선박 2척이 동시에 건조되고 있다.
9년 전엔 그래도… ‐ 2009년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독에서 선박 2척이 동시에 건조되고 있다. /조선일보DB
군산국가산업단지의 중심지인 오식도동은 해가 저물자 인적을 찾아보지 못할 정도로 '유령도시'가 됐다. 건물의 3분의 2 정도가 비어 있었고, 실내 불빛도 거의 없었다. 오식도동 식당 종업원은 "저녁에도 손님 한 테이블 받기도 어려운 지경"이라고 했다. 주민 김모(45)씨는 "한 가구도 살지 않는 원룸 건물이 수두룩하다"며 "사람 사는 동네가 아니다"고 말했다.

10년 구조조정, 조선 생태계만 망가뜨려

10년 가까운 조선 불황 속에 정부는 국책은행을 중심으로 자금 수혈을 통한 연명(延命)에만 급급해 왔다. 그사이 한국 조선의 허리 역할을 해온 중견 조선소 대부분은 폐업하거나 몰락하면서 한국 조선 생태계는 심각한 위기에 놓였다. 8조원 가까운 자금을 지원받고도 법정관리를 받았던 STX조선해양은 올 초 청산 위기를 겨우 넘기고 다시 구조조정 중이다.

한·중·일 조선사 남은 일감 외
4조원이 들어간 성동조선해양은 법정관리 중이다. 경남 통영의 삼호조선, 21세기 조선, 신아SB는 2012~2015년 연이어 파산했다. 2조9000억원이 지원된 SPP조선과 1조원이 투입된 대선조선은 매각이 진행 중이다. 조선사를 떠받치는 기자재 업체들도 고사 직전이다. 조선 기자재를 생산하는 27 상장사 매출 합계는 2012년 7조9000억원에서 2017년 4조6000억원으로 42% 감소했다. 기업 27곳 중 16곳이 공장을 돌려도 이자조차 갚지 못하는 한계 기업이다. 대우조선에 지원된 12조8000억원까지 합하면 10년간 29조원 가까운 자금이 국내 조선사에 출자 전환이나 대출 등 형식으로 지원됐다. 중견 조선사 임원은 "우리가 몰락하면 조선 기자재 산업도 함께 몰락하게 되고, 대형 조선소까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며 "죽어야 할 기업이 연명하다 보니 조선 생태계는 망가졌다"고 말했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는 "조선 경기가 곧 회복될 가능성이 크며 재도약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낙관이 구조조정할 때를 놓치게 했다"며 "산소호흡기를 달면 개별 기업 수명은 연장할 수 있지만 전체 산업 경쟁력은 나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 조선 '넛크래커(nut cracker)' 신세"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대형 3사 사정도 다르지 않다. 작년 매출은 10년 전보다 42% 줄었고, 영업이익은 4조6963억원에서 2227억원으로 95% 급감했다. 고용은 4분의 3으로 줄었다. 중국의 선박 수주 잔량(남은 일감) 점유율은 금융 위기 이후 40% 안팎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은 2012년 31.4%를 정점으로 하락해 20% 초반에 불과하다. 신규 선박 수주량에서도 한국은 중국에 밀리는 상황이 지속하고 있다. 한국 조선사가 해양 플랜트나 LPG·LNG선과 같은 고부가 선박 부문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자평하지만 이마저도 중국·싱가포르 조선사에 시장을 잠식당하는 중이다.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중국은 기술 면에서 예상보다 빠르게 치고 올라오고, 일본은 엔화 약세를 등에 업고 가격 경쟁력까지 가지면서, 한국 조선은 '넛크래커(선진국한테는 기술 경쟁에서 후진국에는 가격 경쟁에서 밀리는 현상)' 신세가 됐다"며 "2000년대 한국이 유럽 조선사를 파산으로 몰고 갔듯이 중국이 한국 조선사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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