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디자이너 요리스 라르만, 산업 디자인에서 패러다임 전환 국제갤러리서 내달 17일까지 전시 "서울은 모두 직선이라 의아해요"
요리스 라르만
금속선이 그물처럼 연결된 벤치가 전시장 한가운데 놓여 있다. 작품명은 '드래건 벤치'. 마치 그물을 허공에 던졌을 때 모양 같은데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복잡하고도 정교한 벤치를 만든 건 사람이 아니라 3D 프린터다.
작가는 네덜란드의 젊은 디자이너 요리스 라르만(39)이다. 그는 '과학자와 예술가 사이를 오가는 작가'라는 평을 받는다. 스물일곱 살이던 2006년 내놓은 '본 체어(Bone Chair)'로 일약 스타가 됐다. 뼈가 자라면서 힘을 많이 받는 부분은 점점 굵어지고, 그렇지 않은 곳은 퇴화하며 가늘어진다는 독일 과학자의 연구에서 영감을 얻어 역시 3D 프린터로 만들었다. 이 작품은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의 영구 소장품이 됐고, 라르만은 2011년 월스트리트저널이 주관하는 '올해의 혁신가상'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라르만이 산업 디자인에서 디지털 디자인으로 패러다임을 전환시키고 있다"고 했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개인전 'Gradients(기울기)'는 또 다른 '과학적 도전'의 결과물이다. 한국에서 2011년 이후 두 번째로 여는 전시다. 그는 "지난 한국 전시 직후 과학자, 엔지니어들과 더 긴밀히 협업해 왔다"고 했다.
‘드래건 벤치’ - 요리스 라르만의 대표작 ‘드래건 벤치(Dragon Bench)’. 길이 3.2m 높이 1.6m다. 스테인리스스틸 케이블이 허공에 던진 그물처럼 복잡하게 연결돼 있다. 용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작품은 라르만이 정교하게 계산한 프로그램과 3D 프린터로 만든 것이다. /국제갤러리
전시에선 그가 세운 3D 프린터 회사 'MX3D'의 프린터로 만든 작품 등 30여 점을 선보인다. '튜링 테이블'은 "동물 줄무늬 등 생태계 패턴은 화학반응으로 생긴 것"이라는 영국 수학자 앨런 튜링의 '튜링 패턴'에서 착안했다. 청동과 스테인리스스틸로 만든 테이블 상판에 표범이나 재규어 무늬 같은 도형이 새겨져 있다. 비슷해 보이지만 사람 지문처럼 전부 다르게 생겼다. 이 패턴들을 라르만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하나하나 만들어 낸다.
'메이커 체어(Maker Chair)' 시리즈는 단단한 호두나무로 각각 다른 모양의 퍼즐 조각을 만든 뒤 끼워 맞춰 의자를 만들었다. '메이커'는 의자를 만드는(make) 디지털 기술을 가리킨다. 그는 메이커 체어의 퍼즐 조각 설계도를 인터넷에 올려 누구나 따라 만들 수 있게 했다. 소형 3D 프린터로도 따라 만들 수 있고, 이를 응용하면 의자가 아닌 다른 모양의 작품도 만들 수 있다.
서울에서 처음 공개된 ‘튜링 테이블’. 동물 줄무늬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다. /국제갤러리
라르만은 "내 에너지의 근원은 의자나 테이블 같은 일상의 사물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곧게 뻗은 직선이 아닌 기울기 있는 곡선이라고 했다. "어제 서울 도심을 산책하면서도 이상하다고 느꼈어요. 아름다운 자연과 인체를 이루는 것은 전부 곡선인데, 서울은 건물부터 청계천까지 거의 모두 직선이라서 의아했어요." 그는 "그동안 산업사회에선 직선이 주로 쓰일 수밖에 없었지만, 디지털 혁명으로 곡선을 산업에서 응용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라르만은 요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작은 운하에 놓일 12.5m 길이의 다리를 만들고 있다. 낙후한 운하 벽이 버틸 수 있는 한계, 연인들이 기념으로 걸어놓을 자물쇠 무게까지 계산하고 있는 중이다. 라르만은 "디자인에만 집중하지 않고 과학·공학·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울러 공공 시설물로 영역을 넓혀나가고 싶다"고 했다. 전시는 6월 17일까지. (02)735-8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