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 투자펀드 삼성넥스트는 지난 1일 스위스에 있는 비키퍼라는 스타트업에 투자를 단행했다. 2012년 창업한 비키퍼는 유통·운송·제조·건설 분야에서 현장 근로자들과 소통하며 업무 관리를 하는 앱을 개발한다. 지난달 12일에는 삼성의 첨단 기술 투자 전문 펀드인 삼성카탈리스트펀드가 스웨덴의 스타트업 맵필러리에도 투자를 했다. 맵필러리는 자율주행차 전용 초정밀 지도를 개발하는 스타트업으로 일반 사용자들이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교통 데이터를 수집·분석하는 기술을 갖고 있다.
삼성전자가 스웨덴과 스위스의 스타트업에 투자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창업 열풍이 거센 미국·중국과 비교해보면 스타트업 숫자도 적고 기술 수준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 3월 유럽 출장 당시 두 지역을 들르고 연이어 투자를 결정했다.
22일에는 영국 케임브리지, 캐나다 토론토, 러시아 모스크바에 인공지능(AI) 연구 센터를 이번 달 중에 열겠다고 밝혔다. 삼성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첫 출장지로 미국, 중국이 아니라 유럽을 택한 것은 새로운 시장과 가능성을 찾기 위한 것"이라며 "삼성의 스타트업, 기술 투자도 점점 더 다변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스타트업 투자 다변화하는 삼성전자
지금까지 삼성의 스타트업 투자는 미국 실리콘밸리와 뉴욕, 이스라엘에 집중적으로 이뤄져왔다. 스타트업 생태계가 잘 구축돼 있고 기술 인재(人材)들이 많이 몰린 지역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면서 기술과 아이디어를 흡수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부회장의 해외 출장과 함께 투자처도 유럽·캐나다 등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그래픽=김성규
본지가 작년 1월부터 최근까지 삼성의 스타트업 투자를 분석한 결과 미국·이스라엘 등 주력 투자처 외에도 헝가리·벨기에·포르투갈·그리스·네덜란드 등 유럽 지역 스타트업 투자가 대폭 늘어나고 있다.
헝가리에서는 지난 1월 자율주행차 기술 기업인 AI모티브에 투자했고, 벨기에에서는 사물인터넷(IoT) 기업인 센티안스에 투자를 단행했다. 이 부회장이 3월 말 유럽 출장 후 삼성이 단행한 스타트업 투자 5건 중 미국 투자는 2건에 그쳤고, 유럽이 나머지 3건을 차지했다.
다변화된 투자 지역과 달리 투자 분야는 이 부회장이 강조하는 AI(인공지능)와 자율주행차에 집중돼 있다. 삼성전자는 작년 자율주행차 전용 펀드인 '오토모티브 혁신 펀드'를 3억달러(약 3250억원) 규모로 조성했다. 이 부회장의 핵심 참모인 삼성전략혁신센터(SSIC) 손영권 사장이 운영을 총괄한다. 또 지난 3월에는 세계적인 AI 석학이자 구글·바이두의 AI 연구를 총괄했던 앤드루 응(Ng) 교수가 설립한 AI 투자 펀드인 '앤드루 응 펀드'에도 투자했다.
◇AI 연구, 영국·캐나다·러시아로 확장
다변화와 첨단 기술 확보라는 키워드는 삼성전자의 내부 투자에도 적용된다. 삼성은 22일 영국 케임브리지에 AI 센터를 개관하는 것을 시작으로 24일에는 캐나다 토론토에 AI 센터, 29일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에 AI 센터를 각각 개관한다.
연쇄적으로 3곳에 AI 센터를 열고 인재 확보와 기술 개발에 총력전을 펼치는 것이다.
케임브리지 AI 센터는 마이크로소프트(MS) 영국 AI 연구소장을 역임한 앤드루 블레이크 박사를 센터장으로 선임하고 감정 인식 등 미래 AI 기술에 집중한다.
토론토 AI센터는 MS 출신의 음성인식·AI 전문가인 래리 헥 박사가 센터장으로 부임하고 모스크바 AI 센터는 수학, 물리학의 강국(强國)이라는 특징을 반영해 AI 알고리즘(연산) 최적화 기술을 개발한다. 삼성전자 김현석 생활가전 부문 대표는 "해외 AI 센터는 삼성전자 미래 기술 확보의 거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용식(式) 경영은 '미래 성장 동력 발굴'
삼성이 투자 방식을 바꾸는 이유는 성장 동력 발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특히 프랑스와 벨기에·헝가리 등 유럽 지역은 최근 들어 기술 스타트업 창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은 시장을 장악한 글로벌 기업이 없다. 이 지역의 스타트업에 선제적으로 투자를 단행해 인재와 기술,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것이다. 삼성넥스트 관계자는 "미국 스타트업들은 투자 경쟁이 심해 기업 가치가 과도하게 평가돼 있는 반면, 유럽 스타트업들은 내실이 탄탄하면서 저평가된 곳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또 삼성전자의 현재 주력 사업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미래 성장 동력 발굴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반도체, 스마트폰 같은 기존 사업은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하다"며 "이 부회장이 삼성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은 새로운 성장 동력 발굴이기 때문에 스타트업이나 기술 투자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