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2일(현지 시각) 문재인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 자리에서 6월 12일 예정된 미·북 정상회담과 관련해 "우리가 원하는 특정한 조건들이 있다"고 했다.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회담을 안 할 것이고 나중에 할 수 있다"고 했다. '특정한 조건'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언급하지 않았다. 외교 소식통은 "비핵화 방법과 속도, 북한 체제 보장 수준과 선후 관계 등을 놓고 미·북 간 이견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
◇美 '초단기 일괄 타결' vs 北 '단계적 비핵화'
트럼프는 이날 "비핵화는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며 "(비핵화 조치에 필요한) 물리적 이유들 때문에 아주 짧은 시간이 걸릴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일괄 타결(all in one)될 것"이라고 했다. 백악관 세라 허커비 샌더스 대변인도 "회담의 목표와 목적은 완전하고 전면적인 비핵화"라고 재차 강조했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가 일괄 타결식으로 초단기에 이뤄지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는 지난 20일 트럼프 행정부 당국자를 인용해서 "(미국은) 김정은이 싱가포르 회담에서 비핵화에 합의하고 6개월 내로 핵무기의 일부 반출, 핵물질 생산 시설의 폐쇄와 자유로운 사찰 등 첫 이행 조치의 실행 일정을 잡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반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3월 말과 이달 초 두 차례 중국을 방문했을 때 '단계적 동시적 조치'를 통한 비핵화를 거듭 주장했다. 핵 신고·사찰·폐기·검증 등을 여러 단계로 쪼개서 협상하고, 각 단계마다 상응하는 체제 보장과 경제적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와 같은 단계적 해결책을 택하면 비핵화 기간도 훨씬 길어질 수밖에 없다. 북한은 지난 16일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의 담화를 통해 '선(先) 핵 포기, 후(後) 보상'과 'CVID', '핵·미사일·생화학무기의 완전 폐기'에도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미·북 간 비핵화 막후 협상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美 '경제적 보상', 北 '체제 안전 보장 먼저'
트럼프는 이날 '김정은이 CVID를 결정하면, 북한 정권의 안전을 보장할 것인가'란 질문에 즉각 "나는 그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고 그는 안전할 것"이라고 했다. 구체적 체제 보장 방안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인위적인 정권교체나 민주화 등을 시도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그(김정은)의 나라는 부자가 될 것이고, 아주 근면하며 번영할 것"이라며 경제적 측면에 초점을 맞췄다. 또 "한국, 중국, 일본과 모두 얘기해 봤는데 그들은 아주 거액의 돈을 투자해서 북한이 위대해지도록 도울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회담 후 국무부 정례 브리핑에 나타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김정은이 미국의 투자, 미국의 기술, 미국의 노하우가 정말 그의 국민에게 가치 있다는 것을 알아보리라 생각한다"며 "그와 이런 전반적 얘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 기업과 주변국의 투자를 통해 북한 경제가 발전하도록 돕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북한은 김계관 부상의 담화에서 "우리는 언제 한번 미국에 기대를 걸고 경제 건설을 해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런 거래를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미 연합공중훈련 '맥스 선더'를 트집 잡아 남북 고위급 회담을 무산시킨 직후 나온 입장이었다. 이달 초 중국에 간 김정은은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과 안보 위협이 제거돼야 한다"고 했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김정은의 방중 직후 트럼프와의 통화에서 "미국은 북한의 합리적인 안보 우려를 고려하길 바란다"며 주한미군 문제를 우회적으로 거론했다. 북한이 경제적 보상보다는 정치·군사적 체제 안전 보장책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이에 따라 북한이 향후 회담에서 미·북 수교와 평화체제 구축, 한·미 훈련 중단, 주한미군 감축·축소 등 '안보 이슈'가 선결돼야 비핵화를 하겠다고 주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날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한·미 간에) 주한미군 문제가 특별히 언급되지 않았다"며 "(미·북 정상회담에서) 인권 문제도 제기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는 얘기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