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트는 문을 연 지 25년 만인 지난 4월 초 각 지점에 '동전 없는 카트'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롯데마트 등 다른 대형 마트도 일부 지점에서 시행 중이다. 이마트 측은 "요즘 현금을 아예 안 가지고 다니는 손님이 많아 직원들이 카트를 빼주는 데 허비하는 시간이 늘어나서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현금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이름하여 '캐시리스(cashless·현금 없는)' 사회. 카드가 상대적으로 많이 쓰이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현금 구경하기가 어려워졌다. 계산대에서 손님이 빳빳한 만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 건네면 점원이 1000원짜리 지폐 몇 장과 동전 몇 닢 세어 거슬러주는 모습은 점점 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현금이 왕이다(Cash is king)." 주로 기업의 재무 건전성을 논할 때 쓰이는 말이다. 다른 어떤 자산보다도 현금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 그런데 '왕'의 지위가 심상치 않다. 지폐와 동전 모두 부피만 차지할 뿐 갖고 다니기 귀찮은 애물단지가 됐다. 아예 한국은행이 나서 '동전 없는 사회'를 추진하고 있을 정도다. 전통시장, 노점상 등도 카드 결제기를 들인다. 1000원짜리 한 장 없이도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다.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지만 현금이 사라지는 속도는 세계 최고다. 뉴욕타임스는 '이미 현금을 거의 없앤 나라'로 한국과 스웨덴을 언급했다. 지난해 국회입법조사처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현금 이용 비중은 17%로 독일(53.2%), 네덜란드(34.3%), 캐나다(23.1%) 등보다 낮았다. 이제 일상에서 현금은 왕이 아니라 허수아비가 됐다.
몇 백원도 카드가 편해
얼마 전까지 일상적인 소액 결제는 현금으로 했다. 편의점이나 작은 수퍼마켓 등에서 현금이 주로 쓰였던 이유다. 이젠 그 마지노선도 무너졌다. 편의점 씨유(CU)는 2016년 카드 결제 비중이 현금 결제 비중을 넘어섰다. 10년 전 카드 결제 비중은 10%대에 불과했지만 작년엔 60%가 넘었다. friday가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를 통해 전국 성인 남녀 50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평소 결제 수단으로 현금을 가장 많이 쓴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6.3%에 그쳤다. 직장인 김수민(29)씨는 "편의점에서 1000원 안 되는 물건은 '동전 없앤다'는 생각으로 동전으로 계산했는데 요즘엔 물가가 올라 1000원이 안 되는 물건이 거의 없어서 쓸 일이 없다"고 했다.
가게 입장에서도 현금 결제하는 손님이 오히려 특이한 손님이 됐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건가’ 하는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 서울 관악구에서 최근 술집을 시작한 정모(26)씨는 “현금을 낸 손님들은 다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매출 2300여만원 중 현금은 50여만원뿐이에요. 손님을 보니 딱 세 종류더라고요. 막 성인이 돼 아직 카드가 없는 1999년생, 외국인, 아니면 불륜 커플.” 구석에 앉아 진한 애정 행각을 벌이면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40~50대 커플이 현금 결제를 선호한다고 한다. 정씨는 “매일 카드만 받다 보니 현금 뭉치가 아직 낯설다”고 했다. 정씨는 돈을 접어서 셀 줄 모르고, 서양인들 돈 세듯 반대쪽 손으로 한 장 한 장 옮기며 센다. 한때는 ‘한국인이 외국인을 보고 답답해하는 것’으로 꼽히던 장면이다.
시온리? 캐시리스!
“현금만 됩니다”는 말은 이제 한국인이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설문 결과 응답자 중 59%가 ‘현금 없어 곤란했던 적 있다’고 답했다. 곤란을 겪은 곳은 노점상(33.7%), 전통시장(32.5%), 자판기(21.6%) 등이었다.
‘캐시온리(cash only)’ 내걸고 현금만 받는 곳은 살아남기 어렵다. 한때 동대문의 옷가게나 강남 지하상가 등에선 한바탕 흥정을 마친 뒤 카드를 내미는 순간 분위기 싸해지며 흥정 이전의 가격으로 돌아가곤 했다. 요즘엔 ‘카드 결제됩니다’라고 붙은 종이를 쉽게 볼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 카드를 받는 시장이나 노점이 늘고 있다. 푸드트럭들도 계좌번호를 붙여놓고 계좌 이체를 받기도 한다.
서울 중구 중부시장 노점 78곳 중 20곳에 신용카드 단말기가 있다. 노점에서 건어물을 파는 박선자(49)씨는 “요즘엔 카드 비중이 3분의 1 정도 된다”고 했다. “손님들이 묻지도 않고 바로 카드를 내밀어요. 전통시장에서도 당연히 카드를 긁을 수 있어야 한다고 인식이 바뀐 것 같아요. 명절 때는 카드 안 받으면 장사가 안 돼요.” 중구청은 명동, 남대문시장 노점에서도 카드 결제를 곧 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미국과 일본에는 최근 아예 현금을 안 받는 ‘캐시리스 스토어(cashless store)’가 등장했다. 국내에도 몇 곳이 시범 운영 중이다. 카드 결제나 간편 결제만 가능한 무인 편의점 등이다. 서울 중구 이마트24 조선호텔점 입구 안내판에는 ‘현금 불가’라고 붉은 글씨로 쓰여 있다.
스타벅스도 지난달부터 판교H스퀘어점·삼성역점·구로에이스점 3곳에서 캐시리스 스토어를 시범 운영한다. 전 세계 스타벅스 중 미국 시애틀에 이어 두 번째. 매장 입구와 계산대 앞에는 ‘현금 없는 사회(Cashless Society)’라는 문구와 ‘현금이 아닌 다른 결제 수단을 써달라’는 안내문이 있다. 해당 매장 직원은 “현금만 들고 온 손님은 근처 다른 매장으로 안내한다”고 했다. 당황하는 손님도 종종 있다. 매장에 현금을 들고 왔다가 모바일 카드로 결제한 신동근(38)씨는 “앞으로 신용 불량자는 커피도 못 마시겠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했다. 전국 스타벅스 매장의 현금 결제 비중은 2010년 31%에서 지난해 7%로 줄었다.
이미 많은 식당과 카페가 ‘비자발적’ 캐시리스 스토어가 됐다. 서울 중구의 한 카페는 전체 매출 중 현금 결제액 비중이 4.4%밖에 안 된다. 동전을 일주일에 1만원어치 채워넣을까 말까다. 이 카페 박유희(24) 점장은 “오피스 빌딩 근처 카페들은 카드 비중이 높다”고 했다.
현금 없는 사회가 되며 어려움을 겪는 이들도 있다. 한 자판기 업체 대표는 “2년 전에 비해 매출이 반 토막 났다”며 “한 대학병원에 자판기 10여대가 들어가 있는데 월 매출액이 800만원에서 440만원 정도로 줄었다”고 했다. “편의점에서 800원짜리 음료수도 카드로 사는데 굳이 자판기를 쓰겠어요.”
캐시리스, 소비 촉진vs경제 관념 모호
전문가들은 “현금 없는 사회가 소비를 촉진한다”고 말한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경제활동이 편리해져 경제 활성화에 도움 되고, 화폐 발행 비용 등 사회적 비용도 줄어든다”며 “현금 사용을 줄이도록 장려하는 정책이 세계적 추세”라고 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현금을 썼던 가장 큰 이유는 결제가 편하다는 점”이라며 “최근 카드 등 다른 결제 수단의 거래 비용이 줄며 현금의 장점이 거의 없어졌다”고 했다.
반면 비현금 수단을 쓰다 보면 소비 규모를 체감하지 못해 경제 관념이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승신 건국대 소비자정보학과 교수는 “결제가 간편해지는 만큼 소비 성향(소득 대비 소비 비율)이 늘고 충동 구매가 이뤄질 수 있다”며 “소득과 분수에 벗어나는 소비를 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