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의 발상지를 찾아서
에릭 와이너 지음 | 노승영 옮김
문학동네 | 512쪽 | 1만8500원
천재(天才)라는 뜻의 영어 'genius'는 라틴어에서 왔는데, 고대 로마에선 '인간을 따라다니는 수호신(게니우스)'이란 의미로 쓰였다. 그 시절엔 누구에게나 자신을 지켜줄 '게니우스'가 있다고 믿었으니, 남보다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사람을 뜻하는 오늘날 천재와는 의미가 달랐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과거의 게니우스 개념이 오늘날 천재와 크게 동떨어진 것도 아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천재는 저 혼자 잘나서 되는 게 아니라 천재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누나 마리아 안나는 동생 못지않은 음악적 재능을 지녔음에도 결혼 후 임신과 육아 부담 때문에 평범한 주부로 살았다. 그러니 적어도 여성에겐 남녀평등이 천재로 발돋움하기 위한 사회적 토대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천재들의 도시'라 할 수 있는 아테네(그리스), 항저우(중국), 피렌체(이탈리아), 에든버러(스코틀랜드), 콜카타(인도), 빈(오스트리아), 실리콘밸리(미국) 등 7곳을 여행하면서 이 도시들이 어떻게 천재를 잉태하고 키워냈는지, 그 비결을 들여다본다.
아테네는 위대한 지역이 될 가능성이 희박했다. 플라톤이 언덕과 바위투성이인 이 땅을 '앙상한 뼈'라고 불렀을 정도다. 게다가 불결하기 이를 데 없어서, 사람들은 이를 닦지 않고, 아무 데나 침을 뱉으며, 결핵에 걸려 떼로 죽었다. 하지만 아테네는 그리스 고대 도시국가 중 유일하게 1년에 40번 민회가 열렸고, 일단 시작되면 동틀 녘부터 해질 때까지 그칠 줄 모르고 정치적 토론이 이어지는 말[言]의 도시였다. 대화는 아테네인의 삶 자체였고, 소크라테스는 대화하는 철학자의 대표 주자였다. 스파르타인들은 성벽을 쌓아 바깥 세계와 단절했지만 아테네인들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너머까지 배를 타고 나아갔다. 개방은 아테네인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심는 자극제였다.
아테네가 지혜를 향해 열린 마음을 가진 도시라면, 르네상스 시기 피렌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를 키워낸 천재 육성 시스템을 자랑했다. 피렌체를 통치한 코시모 데 메디치는 당대의 빌 게이츠였다. 그는 일생의 절반을 재산 모으기에 썼고, 나머지 삶은 예술 후원에 돈을 쏟아부으며 살았다. 피렌체의 천재성을 일궈낸 시스템 또 하나는 '보테가'라고 한 협업 공방이다. 이곳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스승 베로키오의 작품으로 알려진 '토비아스 천사'의 물고기 부분을 함께 그렸다. 피렌체에서 예술은 집단의 사업이었고, 천재성은 타인과 함께 추구해야 할 이상이었다.
빈(Wien)은 저자가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한 도시다. 다른 도시들과 달리 빈에는 황금기가 두 번 있었다. 빈의 1800년대는 베토벤, 하이든, 슈베르트, 모차르트를 배출한 음악 황금기였다. 예술을 감상할 줄 아는 좋은 청중이 천재들을 빈으로 불러 모았다. 예술 평론가 클라이브 벨은 "고도로 문명화한 사회의 특징은 창조적이라기보다 감상(鑑賞)적"이라는 말로 당시 빈에서 발현된 천재성의 특징을 요약했다.
빈의 두 번째 황금기는 1차 세계대전을 앞둔 세기말의 혼돈과 함께 찾아왔다. 프로이트, 클림트, 츠바이크, 말러, 비트겐슈타인이 빈에 모여들었다. 당시 빈의 천재성을 특징짓는 장소는 커피숍이었다. 클림트는 '카페 슈페를'에서 동료 화가들과 함께 분리파 선언을 통해 근대 미술 운동을 일으켰고, 츠바이크는 회고록 '어제의 세계'에서 커피숍을 "일종의 민주적인, 그리고 싼값의 커피 한 잔으로 누구와도 가까이할 수 있는 클럽"이라고 예찬했다.
천재들의 온상으로 실리콘밸리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도시의 특징으로 저자는 인재를 연결해주는 네트워킹과 대학·기업의 벽을 허문 산학 협력, 모험과 실패를 권장하는 전통 등을 꼽는다. 소동파의 도시 항저우는 전통 계승에서 강점을 드러낸 곳으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이 활약한 도시 에든버러는 실용성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한 도시로 성격을 규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