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5.26 01:14

크리스티 설립 250주년 기념 책
당대 최고 가격 반 고흐 그림 비롯 운석·아인슈타인의 원고 등
흥미로운 사연 얽힌 250점 추려

세상을 놀라게 한 경매 작품 250

세상을 놀라게 한 경매 작품 250

크리스티 책임편집 | 이호숙 옮김
마로니에북스 | 496쪽 | 3만원

1990년 빈센트 반 고흐 생애의 마지막 몇 달을 돌봐주었던 의사 가셰의 초상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됐다.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8250만달러(약 932억2500만원)에 일본 제지 회사의 사이토 료에이에게 낙찰됐다. 1890년 반 고흐가 자살 직전 그린 작품으로 작가는 "상심으로 지친 우리 시대의 표정"이라 말했다. 반 고흐의 동생 테오의 미망인이 그림을 판 이후 프랑크푸르트 한 미술관에 있던 작품은 나치가 '퇴폐 예술'로 분류해 1937년 미술관 소장품에서 제외됐고 이후 헤르만 괴링이 구입했다. 1990년 이 그림이 경매장에 나타났을 때 미술시장엔 금융 시장 붕괴에 대한 루머가 팽배했다. 유찰의 우려를 떨치고 그림이 경이로운 가격에 낙찰됐을 때 안도의 박수가 쏟아졌다. 사이토는 그림과 함께 화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996년 숨졌다. 그러나 유언이 철회됐다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소더비와 함께 세계 양대(兩大) 경매 회사로 꼽히는 크리스티 설립 250주년을 기념해 발간된 책이다. 1766년 설립자 제임스 크리스티가 런던에서 첫 경매를 시작한 이래 크리스티에서 판매된 주요 작품 250점을 추렸다. '가셰 박사의 초상'처럼 당시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만 소개한 건 아니다. 경매에 대해 모르는 이들도 미술시장을 이해할 수 있도록 흥미로운 사연과 의미가 담긴 작품을 골랐다.

반 고흐의 1890년작 ‘가셰 박사의 초상’. 1990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약 932억원에 낙찰된 후 공개되지 않았다. 반 고흐는 가셰의 초상을 두 점 그렸는데 나머지 한 점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
반 고흐의 1890년작 ‘가셰 박사의 초상’. 1990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약 932억원에 낙찰된 후 공개되지 않았다. 반 고흐는 가셰의 초상을 두 점 그렸는데 나머지 한 점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 /마로니에북스

1765년 영국 체셔주에서 대장장이의 딸로 태어난 에마 해밀턴은 당대 최고 미인으로 나폴리 영국 대사 윌리엄 해밀턴과 결혼했다. 엘리자베스 비제-르 브룅이 그린 '아리아드네로 분장한 에마 해밀턴의 초상'에서 에마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비스듬히 누워 있다. 미술품 컬렉터였던 남편 해밀턴 경의 수집벽은 거액의 빚으로 이어져 1801년 3월 전 재산을 크리스티 경매에 내놨다. 에마의 초상화도 포함될 뻔했으나 당시 그녀의 연인이었던 넬슨 제독이 300파운드에 그림을 사겠다고 크리스티에 은밀히 부탁했다. 넬슨은 "만일 내게 300방울의 피를 값으로 치르라고 했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내주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아시리아 왕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궁전을 장식했던 벽면 부조는 1840년대 고고학자 헨리 레이어드가 발굴했다. 레이어드는 그중 일부를 후원자 존 게스트에게 선물했다. 게스트는 이를 시골 별장에 설치했는데 1929년 별장이 학교가 되면서 유물이 설치된 건물이 매점으로 바뀌었다. 60여 년 뒤 미국의 아시리아 학자 존 러셀이 매점을 둘러보다가 벽의 부조가 아시리아 유물이라는 걸 발견한다. 유물은 1994년 런던 경매에서 770만1500파운드(약 133억1500만원)에 낙찰됐고 학교는 이 수익으로 스포츠 센터를 짓고 '아시리아 장학금'을 만들었으며 전교생에게 초콜릿 바를 하나씩 선물했다.

주디 갈랜드가 신은 진홍색 스팽글 구두

경매가 미술품만 다루는 건 아니다. 운석, 아인슈타인의 원고 등 수집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모두 거래된다. 2000년 크리스티 뉴욕에선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 역을 맡은 주디 갈랜드가 신은 진홍색 스팽글 구두〈작은 사진〉가 66만달러(약 7억4600만원)에 낙찰됐다. 미국 의회 도서관에 따르면 '오즈의 마법사'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이 본 영화다. 2006년 12월 런던 경매에선 오드리 헵번이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입은 지방시의 블랙 드레스 모델이 된 옷이 46만7200파운드(약 10억4200만원)에 낙찰됐다. 지방시는 이 드레스를 작가 도미니크 라피에르의 인도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 경매사가 망치를 내리쳤을 때 라피에르만큼 기뻐한 사람은 없었다. "눈물이 나네요. 옷 한 벌이 세계에서 가장 궁핍한 어린이들에게 학교를 지을 벽돌과 시멘트를 사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 말이 안 나옵니다."

화려한 도판과 함께 즐겁게 읽을 수 있어 미술사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다. 경매가 부유한 이들의 돈놀이만은 아니라는 것, 수집벽에 불타는 컬렉터들이 존재하기에 잊힐 뻔한 수많은 유물이 발굴돼 세상의 조명을 받고, 미술관에 전시되며 역사로 남는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책이다. 원제 Going O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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