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 교수 3명, 경영학 교수 1명, 인터넷 경제매체 대표 1명."
지난 21일 현대차그룹이 추진하던 지배구조 개편을 잠정 중단하기로 한 데에는 이 5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국민연금과 자문계약을 한 의결권 자문사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의 외부 전문 위원회 구성원이다. 이들이 반대 의견을 결정하자, 현대차는 그룹의 청사진을 수정 검토했다.
최근 정부의 '스튜어드십 코드'(적극적인 의결권 행사 지침) 도입 압박에 따라 기관투자자들이 자문사들에 주요 판단을 위임하게 되자, 의결권 자문사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국내 자문사에 대해서는 전문성이나 경험이 부족하다는 의심이, 글로벌 자문사들에 대해서는 한국 사정을 잘 모르고 투기 자본의 목소리만 대변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최대 자문사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외부에 또 자문기구 둬
의결권 자문사들의 영향력이 세진 것은 정부가 기업 주식을 가진 연금이나 펀드에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라'고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자문사와 반대 의견을 내려면 대표의 정식 결재를 받는 것으로 규정이 바뀌었다"며 "자문사에 주요 결정 책임을 떠넘기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한국 최대 자문사로 알려진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수퍼 파워'로 떠오르고 있다. 이곳은 현재 상근 인력이 35명 정도인 연구기관으로, 주총 의안을 분석하고 자문하는 팀원은 10명 이하다. 이번에 지배구조원은 내부적으로는 '찬성 의견'을 내려놓고, 파장을 의식해 외부 전문위원회에 최종 결정을 맡겼다. '외주의 외주'를 준 이중 떠넘기기가 된 셈이다.
외부 위원회는 법학 교수들 위주로 구성돼 있고, 이례적으로 인터넷 매체 대표가 포함돼 있다. 공정성과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는 인적 구성이냐는 의문도 일부에서 나온다. 지배구조원은 금융투자협회·상장사협의회 등 자본시장 유관기관이 출자한 사단법인이다. 그러나 한국거래소 같은 공기업이 포함돼 있고 원장 임명에 정부가 영향을 미치는 등 정부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민간업체인 대신지배구조연구소는 상근인력 12명과 상근인턴 5~7명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 증권사 등 금융권에서 일한 경험자들이지만 펀드 매니저 출신은 없다.
이원일 제브라투자자문사 대표는 "의결권 행사는 매우 '경험적(empirical)'인 활동으로, 어떤 의사결정을 했을 때 기업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의결권을 많이 행사해본 운용 전문가들이나 경영자들이 잘 안다"며 "지금 자문사는 법적으로 어떤 문제가 되는지만 따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ISS, 미국 사모펀드가 소유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글로벌 자문사들은 엘리엇 같은 투기 자본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글로벌 최대 의결권 자문사로 알려진 ISS는 1985년 모건스탠리자산운용이 설립해 운영하다 2014년 베스타 캐피털이라는 사모펀드에 매각됐다. 이 회사는 기업을 인수한 지 3년 만에 또 다른 사모펀드 젠스타 캐피털에 되팔았다. ISS는 지난 2012년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이 공격한 미국 제약회사의 주총에서, 칼 아이칸이 추천한 2명의 이사 후보를 지지하라는 의견을 고객사들에 내기도 했다.
ISS는 900~1000개에 달하는 한국 기업을 자문하지만 인력은 3~4명 수준으로 알려졌다.
금융권의 한 인사는 “작년 말 기준으로 한국말을 하는 애널리스트와 보조 인턴 2~3명이 한국 기업을 담당했다”고 말했다. ISS는 이번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에 대해 엘리엇과 판박이 논리를 댔다. 글로벌 2위 자문사로 알려진 글래스루이스는 한국 담당이 따로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튜어드십 코드(집사의 지침)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주주들이 기업의 리스크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비판이 나오자 2010년 영국이 처음 도입한 것이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이 코드는 ‘선량한 재산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라는 것으로 기업의 장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정신이 포함돼 있지만, 그동안 ‘주주 행동주의’는 투기자본의 단기 차익을 목적으로 이용되어 왔다”며 “정부가 기관투자자들에게 의결권 행사를 지나치게 강요하지 말고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
연기금·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자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steward)처럼 자신이 주식을 가진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행동지침. 2010년 영국을 시작으로 20여 개국이 도입했고, 2016년 말 우리 정부는 ‘기관투자자의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을 공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