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를 근로시간으로 봐야 하는지 너무 모호합니다. 법무팀과 인사팀에서도 아직 어떻게 할지 결론을 못 내고 있어요."(10대 그룹 관계자)
'주당 최대 52시간 근무제' 시행(7월 1일)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없어 기업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거래처와 저녁 약속이나 사내 회식을 근로시간으로 봐야 할지, 임원에게도 주 52시간 규정을 적용해야 하는지를 놓고 혼란에 빠진 것이다. 근무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보냐에 따라 근로시간은 주당 52시간을 훌쩍 넘길 수 있고, 이 경우 회사 대표에 대한 형사처벌로도 이어질 수 있다.
◇거래처 술자리, 회식, 출장은 어떻게
가장 불확실한 것은 거래처와 저녁 약속이다. 기업마다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지금까지는 영업직군이 퇴근 후에 통상적으로 고객과 만나는 것에 대해 근로시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지금까지 적용해온 기준을 7월부터 당장 바꾸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식품 제조 대기업인 A사는 대표이사가 "거래처와 저녁 약속을 잡지 말라"고 지시했다. 근로시간 인정 여부가 문제 될 소지가 있으니 아예 금지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식품업체 B사는 거래처와 저녁을 할 경우 무조건 4시간 일한 것으로 인정해주기로 했다. B사 관계자는 "애초 술자리를 마치고 집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타는 시간까지 정확히 근로시간으로 계산하려 했지만, 자발적으로 2차를 하는 경우도 있어 4시간으로 정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해서 일한 시간이 기준을 초과하면 대휴를 써서 하루를 쉬거나, 출근을 늦게 하거나 퇴근을 일찍 하는 방법으로 근로시간을 맞출 계획이다.
석유화학 대기업인 C사는 저녁 자리를 만들지 말되, 꼭 필요한 경우 미리 신고를 하도록 했다. 건설업체인 D사는 거래처와 술자리를 가져도 오후 10시까지만 근로시간으로 인정해주기로 했다. 또 인정해준 시간만큼 다음 날 출근을 늦게 하도록 할 예정이다. 대신 오후 10시 이후엔 법인카드도 쓸 수 없게 한다.
사내 회식이나 워크숍 등을 근로시간으로 봐야 할지도 논란이다. 이 때문에 일부 기업은 회식을 저녁이 아닌 점심때만 하도록 하고, 워크숍도 1박2일이 아닌 당일 일정으로만 가도록 지침을 만들었다. 출장 갈 때 이동 시간이나 관광 일정도 근무시간에 포함해야 하는지도 불분명해 기업들은 혼란스럽다.
임원에게도 근로시간 규정을 적용해야 하는지는 전문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임원이라 하더라도 권한 등이 적으면 근로자로 볼 수 있어 적용할 수 있다는 시각이 있는 반면, 그래도 관리자이기 때문에 적용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현행법은 관리 감독 업무를 하는 근로자에 대해선 근로시간 규정을 적용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고용부는 가이드라인도 안 내놔
기업들이 갈피를 못 잡는 상황에서 주무 부처인 고용노동부는 제대로 된 가이드라인을 못 만들고 있다. 고용부는 지난 2월 국회에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되자 차관 주재의 태스크포스(TF)까지 꾸렸다. 지난 18일엔 65쪽 분량의 설명 자료도 냈다. 그러나 이 자료에선 정작 어디까지를 근로시간으로 봐야 하는지는 빠져 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개별 상황마다 판단이 달라질 수 있고, 워낙 경우의 수가 많아 일률적으로 정리하기 어렵다"고 했다.
정부가 이런 입장을 지속하면, 향후 근로시간 인정 여부가 논란이 되는 경우 법원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아무도 결정을 못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재계에서는 과거 통상임금 문제처럼 정부가 법원에 모든 걸 떠넘기고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정부 방침이나 법원 판례도 없는데 기업이 자체 기준을 만들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애매한 시간 모두를 근로시간으로 인정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자칫하면 나중에 불법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김영완 경총 노동정책본부장은 "사업장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급하게 제도를 도입하다 보니 혼란이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