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6.01 03:00 | 수정 : 2018.06.01 10:22

[대도서관]

'1인 크리에이터' 나동현

1인 크리에이터 나동연
키가 181㎝인 유튜버 나동현은 폴짝 뛰어도 성큼 솟아올랐다. 그가 유튜브 방송에서 사용하는 이름 ‘대도서관’은 ‘문명 V’라는 게임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얻고 싶어 하는 가상현실 속 건축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따온 것이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헐! 대도다!" 대도서관(본명 나동현·40)과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근처 한 영어학원에서 쏟아져 나온 중·고등학생 수십 명이 일제히 소리 질렀다. 지나가던 한 중년 남성이 중얼거렸다. "누군데 이 난리지?"

요즘 이 남자를 모르면 '쉰 세대'라고 불려도 크게 할 말이 없다. 유튜브에 개인 채널을 운영하는 이들을 두고 흔히들 유튜버 또는 1인 크리에이터라고 부른다. 게임 방송을 진행하는 대도서관은 그중 '유튜버계의 유재석'으로 불린다. 현재 유튜브에서 172만명 구독자를 거느리며 채널 '대도서관 TV'를 운영한다. 각종 광고·강연 수익으로만 1년에 17억원쯤 번다. 미디어 콘텐츠 회사 '엉클대도'의 대표이기도 하다. 최근엔 '유튜브의 신'(비즈니스북스)이라는 제목으로 책도 냈다. 지난달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대도서관은 키가 훤칠하고 멀끔했다. 겉모습만 봐선 대기업 직장인 같았다.

국회도 찾는 유튜브의 神

―2월 말쯤 대도서관 생방송에서 '국민과 함께하는 개헌' 사이트 얘기를 하는 걸 봤다.

"국회 개헌특위팀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진행했다. 물론 광고비도 받았다. 연예인이 그동안 이미지로만 홍보했다면 나 같은 유튜버는 아예 콘텐츠까지 제작해주니 만족도가 높은 것 같다. 여성가족부와 손잡고 청소년 긴급 상담 전화를 홍보한 적도 있고, 외교부와도 진행하는 프로젝트도 조만간 시작한다."

―유튜버는 '자극적인 방송을 하는 사람'이란 편견을 깬 덕분일까.

"아무래도 그럴 것이다. 2010년 1인 미디어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스스로와 다짐한 게 있다. '길게 보고 일하자'고. 당시만 해도 다들 별풍선을 받고 인기를 얻기 위해 자극적인 말과 행동을 할 때였다. 조금 인기 얻으면 대부분 파일공유사이트 같은 광고 배너를 달았다. 도박 사이트 광고도 있었다. 난 욕설도 하지 않았고 인기를 얻고 나서도 그런 광고는 달지 않고 진행했다. 그래야 나중에 더 크고 넓은 물에서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정말 그랬고."

―대부분 시행착오를 하고 나서 깨닫는 법칙이다. 그걸 처음부터 알았다는 걸까.

"다행히 내겐 판을 그리는 눈이 있었다. 사표 내고 나왔을 때가 페이스북, 트위터가 처음 들어왔을 때였다. 국내에선 별 반응이 없었다. 다들 싸이월드를 더 열심히 했다. 그때 이미 직감했다. 패러다임이 바뀔 거라는걸. 지금이야말로 1인 미디어를 시작해야 하는 때라는 걸 말이다."

밑질 게 없다는 마음

1인 크리에이터 나동연
유튜브로 방송하는 대도서관. / 유튜브 캡처

대도서관은 인천의 한 철물점집 아들이었다.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때 세상을 떠나고 집안이 더 기울자 나중엔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될 사람은 된다. 제대하고 인터넷 강의하는 IT 업체에서 아르바이트하다 정직원으로 채용됐다. 얼마 뒤엔 온라인 교육 콘텐츠 회사 이투스(훗날 SK커뮤니케이션즈에 합병)에 입사했다. 대학 졸업장도 그 흔한 자격증도 없었다. 자기소개서에 승부를 걸었다. '귀사 홈페이지를 이렇게 수정했으면 좋겠다'는 도발적인 기획안을 냈고 그 덕에 뽑혔다. 스펙도 학벌도 없이 대기업 사원이 된 것이다. 어느 순간 "그래도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회사 이름에 기대지 않고도 나동현 이름 석 자로 먹고살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발견한 게 바로 1인 방송이었다. 결심이 서자 사표부터 냈다.

―남들에겐 항상 "유튜버한답시고 덜컥 사표부터 내지 마라"고 말하던데.

"맞다(웃음). 다만 내 경우는 상황이 좀 남달랐다. 당시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난 직후였다. 뭘 해도 잃을 게 딱히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1인 방송이 보였다. 마이크와 컴퓨터만 있으면 됐다. 보증금·권리금부터 내고 치킨집하는 것보단 위험 요소가 적다고 생각했다. '망하면 다시 취직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래도 초기엔 고생했다던데.

"퇴직금을 까먹으면서 몇 달 방송했지만 초기엔 돈 한 푼 못 벌었다. 쌀이 딱 한 움큼 남아 있었다. 그걸로 미음 끓여 먹으며 사흘을 버텼다."

대도서관 초기 별명은 '유교 방송인'이었다. 점잖은 표현만 고집했다. "밋밋하다"는 반응은 곧 "신선하다"가 됐다. 인기를 끌자 광고 수익이 불어났다. 2015년엔 한 숙취 해소 음료 광고 모델로도 등장했다. '엉클대도'를 만들고 나선 전문경영인도 고용했다. 밤엔 방송하고 낮엔 광고를 찍거나 강연을 다닌다. 요즘도 그가 올리는 유튜브 편집 영상은 매일 100만 조회 수를 기록한다.

―당신이 아프리카 TV를 나와 플랫폼을 유튜브로 옮기자 아프리카 TV 주가가 폭락하기도 했다.

"당시 여의도를 걷고 있는데 넥타이 맨 증권맨들이 날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버스에서 틀어놓은 라디오 시사 뉴스에 내 이름이 나오기도 했고(웃음). 아프리카 TV는 당시로 치면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같은 곳이었다.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었고 그래서 나도 거기 있으면 손님을 모으기가 쉬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맛집이라면 지방으로 가도 손님이 찾아오지 않을까?' 그래서 유튜브로 옮겼다. 당시 유튜브는 허허벌판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두려울 건 없었다. 내 콘텐츠가 있으니 그걸 보고 다들 찾아와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다행히 틀리지 않았다."

길을 닦는 사람

게임 방송으로 유명해졌지만 대도서관은 이젠 한 종류의 콘텐츠를 만드는 크리에이터가 아니다. 조만간 푸드 채널을 시작한다. 키즈 채널도 곧 만들 예정이라고 했다.

―사업이 커지면 리스크도 커지는데.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을 만들고 관련 방송을 하고 싶어서 회사 이름도 처음부터 '엉클 대도' 즉 대도 삼촌이라고 지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나하나 두들겨가며 이뤄가려 한다."

―유튜버는 얕고 넓은 지식과 말발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일도 계속하려면 깊이 공부를 더 해야 하더라. 요즘 10대는 구글·네이버 같은 포털보다 유튜브를 더 많이 검색한다. 앞으론 모든 정보를 동영상 콘텐츠에서 찾는 시대가 될 거다. 이럴 때 게임 예능만 하고 있을 순 없다. 대학을 다시 갈 생각도 있고 요리 학교를 다닐 생각도 있다. 지식을 더 습득해서 더 나은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그 일만으로도 바쁠 텐데 책 쓰고 강연도 다닌다.

"유튜버라는 직업을 알리고 싶어서 그렇다. 우리 본부장님은 구글과 유튜브 재팬에서 일하다가 우리 회사로 왔다. 대기업보다 우리 회사에서 가능성을 읽었다는 얘기다. 이런 걸 널리 알리고 싶다. 5000만 인구끼리 밥그릇 놓고 경쟁할 일이 아니다. 50억 세계인을 손님으로 모을 수 있다."

―길을 닦고 싶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정확하다.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유튜버로서의 내 꿈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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