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엔 영국서 지휘자로 데뷔… 망할 수도 있어요, 하하!"

'당신이 피아노 치는 걸 누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느냐'는 물음에 김선욱(30)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저!"라고 답했다. "늘 그런 건 아니에요. 남들은 제가 철저히 연구하고 계산해서 피아노를 치는 줄 아는데, 실은 본능적으로 자연스럽게 연주해요. 연주가 잘되면 기분 좋고, 잘 안 되면 숨고 싶을 만큼 스트레스받고요. 그럴 땐 소설을 읽지요. 읽다 보면 잡념이 사라지거든요." 지난 29일 서울 신사동에서 만난 김선욱은 "얼마 전 셰익스피어 전집도 다시 읽었다. 문학은 내가 누리는 유일한 호사"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김선욱은 2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이스라엘 출신 가이 브라운슈타인(47)과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1~3번)을 연주한다. 브라운슈타인은 2000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최연소 악장으로 임명돼 13년간 주목을 받은 바이올리니스트. 둘은 파리에서 만나 '친구'가 됐고, 1년에 두세 번씩 듀오 콘서트를 열어왔다. 둘이서 의기투합한 공연. 김선욱은 "연주자마다 음악을 만드는 방법이 다른데, 우리는 표현 방식이 닮아 편하다"고 했다.

열여덟 살이던 2006년 리즈 국제 콩쿠르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우승한 김선욱은 또래 피아니스트들 가운데 드물게 전문 연주자의 길을 걷고 있다. 후배 조성진이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기 10년 전부터 런던을 중심으로 유럽 무대를 누비며 한국을 대표했다. 런던 심포니, 필하모니아, 런던 필하모닉 등 유명 교향악단과 꾸준히 협연하고 있고, 파리 살 플레옐과 런던 위그모어홀에서 독주회를 열었다. 2014년에는 본머스 심포니 협연으로 BBC프롬스에 데뷔했다.

결혼해 다섯 살 아들을 둔 아빠이니 남들은 사회생활 시작할 나이에 안정을 이룬 셈이지만, 그는 한동안 몹시 불안해했다. 2~3년간 연주는 잡혀 있는데, 그 후 활동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음악가의 불확실한 삶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만 되뇌었죠."

김선욱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아이였다. 피아노 연습만 해도 모자랄 나이에 미술관·박물관 안 가는 데가 없었다. 콩쿠르에 나가면 그 지역의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했고, 유명한 상점도 들러야 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시절 스승이던 김대진 교수가 '아이작 스턴은 맨해튼 남북을 오가는 버스를 수십 번 타며 자기 삶을 고민했는데 너는 고민이란 단어가 뭔지 아니?'라고 다그쳤다. 그날 김선욱은 예술의전당 앞 터널의 높이 2m 난간에 올라 손으로 이마를 짚고 앉았다. 놀란 김 교수가 뭐 하는 거냐고 소리치자 심드렁하게 "고민하는데요?"라고 답할 만큼 괴짜였다.

20대에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특히 건축물과 요리, 가죽 신발처럼 장인 정신이 깃든 물건에 탐닉했다. 피아노에 집중하란 말을 들으면 '딴것도 재미있는걸' 하며 흘렸다. "그런데 한순간 눈앞의 모든 게 무(無)로 돌아가면서 다른 세상이 열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텅 빈 무대에 남아있는 건 피아노 하나. "피아노로 걸작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지요. 저는 '피아노꾼'이 되고 싶어요. 피아노를 하루라도 못 치면 죽을 수도 있는 사람. 그래서 요즘은 피아노가 마약 같아요."

한 달 전 그는 런던에서 베를린으로 둥지를 옮겼다. 베토벤·브람스·슈만 등 좋아하는 독일 음악에 제대로 빠지기 위해서다. 1년 뒤 본머스 심포니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으로 지휘자 데뷔도 한다. 그가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미래가 없는 데뷔예요.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는. 망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요."

▶가이 브라운슈타인＆김선욱 듀오=6월 1일 오후 7시 30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2일 오후 7시 LG아트센터, (02)599-5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