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토박이에게 정통 평양냉면 맛은 문화 충격에 가깝다. 광주 출신 미식가이자 음식칼럼니스트인 주영욱(57) 베스트래블 대표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에 와 평양냉면을 처음 맛봤습니다. '우래옥'으로 기억하는데, 전혀 다른 나라 음식 같았습니다."
그런 전라도에서 평양냉면 열풍이 불고 있다. 지난해 광주에 문 연 평양냉면 전문점 '광주옥 1947'은 점심·저녁마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설 정도로 인기다. 이 식당 안유성 대표는 "지난 4월 남북 정상회담 파급효과가 어마어마하다"며 "평일 평균 50그릇가량 팔다가 회담 이후로는 500~600그릇씩 팔고 있다"고 했다. "젊은 세대들은 이전부터 서울 가서 평양냉면을 맛볼 정도로 관심이 있었지만 정상회담 이후 모든 세대가 관심을 갖는다"고 했다.
'냉면 불모지'였던 광주광역시에 평양냉면이 유행을 타고 있다. 간 세고 향 짙은 남도 음식과 정반대인 평양냉면을 먹기 위해 광주 한 평양냉면집 앞에서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 /김영근 기자
오랫동안 전라도는 '냉면 불모지'였다. 남도 음식의 경쟁력이 워낙 높아 다른 지역 음식이 성공하기 힘들고, 특히 무미(無味)하달 만큼 심심한 평양냉면은 양념 진하고 맛이 강한 호남 음식에 밀려 '돈 주고는 못 먹을 국수' 취급받았다. 정통 평양냉면은 찾기조차 어려웠고, 냉면은 고기 먹은 뒤 입가심으로 먹는 '맵고 달고 차가운 국수' 정도였다.
사실 광주의 평양냉면 유행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음식칼럼니스트 박정배씨는 "광주의 평양냉면 첫 전성기는 1947년을 기점으로 한 1940년대 후반"이라고 했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지자 이북 사람들이 대거 월남합니다. 해방 이전에도 남한에 냉면집들이 있었지만 1947년 이후 월남한 평안도 사람들에 의해 서울은 물론 부산·대구·광주 등 전국적으로 평양냉면이 확산됩니다. 광주에도 1947년 문 연 '광주관' 등 여러 냉면집이 현재 금남로인 옛 광주역 앞에 자리 잡았습니다." 당시 지역신문에 광고를 낸 냉면집만도 4개였다.
그러나 광주의 평양냉면은 6·25를 전후한 반공 분위기에 타격을 입고 사라졌다. 안 대표는 "광주에서 성안식당이란 이북 음식점을 운영하던 3형제가 있었는데, 1960년대 간첩으로 의심받아 잡혀 들어가는 등 고초를 겪었다고 알고 있다"고 했다. 이후 평양냉면 등 북한 관련 음식과 식당이 모두 사라졌다.
음식 전문가들은 "현재의 광주 평양냉면 열풍은 호기심 때문이며 사그라들 것"이란 주장과 "맛을 아는 사람들이니 자꾸 접하다 보면 즐기게 될 것"이란 주장으로 갈린다. 주영욱씨는 "밍밍하지만 먹다 보니 '개미(맛을 뜻하는 전라도 표현)'의 여운 같은 게 있더라"며 "나의 경우 평양냉면 맛을 제대로 알기까지 10년 걸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