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의식을 잃은 운전자를 구하기 위해 고의로 교통사고를 내는 일이 연이어 있었다. 지난달 12일 제2서해안고속도로에서 SUV 차량 운전자(54)가 정신을 잃었다. 옆을 지나던 한영탁(46)씨가 자신의 차량으로 앞을 막아 세웠다. 지난달 30일에는 경남 함안군 고속도로에서 쓰러진 트럭 운전자를 다른 시민이 자신의 차량으로 막아 구출했다.
주행 중 의식을 잃은 운전자들은 모두 뇌전증 증세를 보였다. 뇌전증은 언제 증상이 나타날지 예측이 어렵다. 운전자가 순간 쓰러져 대형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2016년 7월 부산 해운대에선 뇌전증 환자가 몰던 외제차의 고속 질주로 3명이 사망하고 20명이 다치는 사고도 있었다. 이 때문에 사고를 막기 위해 나라마다 뇌전증 환자의 운전면허를 제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기준이 상대적으로 느슨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뇌전증 질환을 가지고 있다고 무조건 운전을 금지하는 건 차별이다. 그러나 증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커 본인 의지와 관계없이 사고를 유발할 위험이 있으면, 운전대를 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도로교통법은 뇌전증 환자의 운전면허 취득을 제한하고 있다. '뇌전증 등으로 정상적인 운전을 할 수 없다고 전문의가 인정하는 사람'은 운전면허를 못 딴다. 하지만 현실에선 뇌전증 환자의 면허 취득을 제한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우선 뇌전증 환자가 면허 시험을 볼 경우, 응시표 병력란 '뇌전증' 항목에 체크해야 한다. 그러나 자진 신고하지 않더라도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신고한 환자들은 운전적성판정위원회로부터 합격 판정을 받아야 하는데, '운전이 가능하다'는 전문의 소견서만 있으면 된다. 면허 취득 이후 뇌전증이 발병했다면 10년에 한 번씩 받는 '수시적성검사' 때 자진 신고해야 한다. 역시 소견서만 있으면 대부분 통과한다. 실제 '운전 불가' 판정을 내는 의사가 드물다고 한다. 2016년 뇌전증으로 군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은 366명 가운데 운전면허 수시적성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은 사람은 9명(2.5%)뿐이었다. 한 신경외과 전문의는 "운전 부적격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생계형 운전자들이 '통과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사정할 경우 소견서를 좋게 써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선진국은 우리보다 훨씬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다. 미국은 주(州)마다 다르지만 6개월에서 1년간 뇌전증이 재발하는지 관찰 기간을 가진 후에 면허를 허가해준다. 프랑스는 5년간 발작 증세를 일으키지 않아야 하고, 영국은 10년 동안 항뇌전증제 처방 없이 재발하지 않아야 한다. 경찰청은 운전 부적격 중증질환에 대한 의학적 판단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작년 강원대 의대에 연구 용역을 의뢰했다.
경찰은 뇌전증 운전자에 대한 기초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민감한 의료 기록이라는 이유로 보건 당국으로부터 받을 수 없다. 국방부와 병무청만 뇌전증으로 군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은 명단을 경찰청에 제출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선진국은 운전 부적격 기준을 정해놓고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환자 명단을 즉시 경찰이나 면허 관리 당국에 통보한다"며 "개인 정보 보호도 좋지만, 안전을 위해 최소한의 뇌전증 환자에 대한 정보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뇌전증
뇌 신경세포에 가해진 전기 자극 때문에 일시적이고 불규칙적으로 발작이 일어나는 질환이다. 예전엔 간질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