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그리는 화가 강요배, 추상화 중심의 '象을 찾아서'展 붓 대신 구긴 종이·말린 칡뿌리로 제주가 지닌 거친 抒情을 표현
제주의 맵찬 바람에 부서진 파도가 거대한 바위를 치고 올라간다. '철썩!' 하고 요동쳤다 휘발되는 찰나. 강요배(66)는 이 순간을 '치솟음'이란 그림으로 그렸다. 사진으로 찍거나 미리 스케치하지 않았다. 파도가 바위를 때리는 걸 볼 때마다 머리에 기억하고(印象·인상), 마음에 새긴 뒤(心象·심상), 그림으로 이끌어(抽象·추상)냈다.
파도가 바위를 치고 올라가다 하얗게 부서지는 풍경을 담은 '치솟음' 앞에 선 화가 강요배. '철썩'하는 소리가 시원하게 가슴을 친다. "가슴이 답답해서 무엇인가를 그려 뚫어볼까 싶을 때 그렸다"고 했다. /학고재 갤러리
서울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강요배 개인전 제목은 '상(象)을 찾아서'. 회화 30여 점이 걸렸다. 코끼리 사진도 없고 코끼리를 볼 수도 없을 때, 이 동물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마음속 형상을 떠올리거나 음미한다는 의미의 한자 '코끼리 상(象)'은 여기서 유래했다. 강요배의 시도는 자기 마음속에 숨어 있는 '코끼리'를 찾아내는 것. 그의 코끼리는 고향 제주의 풍천월해(風天月海)와 투박하고 성근 제주의 땅을 인고하며 살아가는 화초목(花草木)이다.
민중미술 1세대로 1981년부터 '현실과 발언' 동인을 했고, 제주 4·3 사건 연작을 그린 '제주 화가'로 유명하다. 서울대 미대를 나와 1992년 첫 개인전을 한 뒤 고향인 제주로 내려갔다. 2015년 제27회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했다.
봄에 핀 홍매를 그린‘춘색’. /학고재 갤러리
강요배는 "사진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무엇이 그림을 그림답게 만드는가?"라는 고민에서 시작한 신작을 두고 '추상화'라고 했다. 이 풍경은 직접 보면서 그린 것도 아니고 사진을 보고 그린 것도 아니다. 그는 "대상을 바로 그리지 않고 그 상(象)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을 간직한다. 이 강렬했던 기억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캔버스와 나 사이엔 아무것도 없어요.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상이 있죠. 군더더기를 버리고 단순화해 명료하게 그린 것이 바로 그림입니다."
물보라를 묘사한 '치솟음'에서 소리가 느껴졌다면 오이와 두부를 그린 정물에선 달큰하면서 부드러운, 막걸리 향내가 난다. 대부분의 풍경화는 나무껍질이나 현무암 같은 제주의 거친 질감을 갖고 있다. "붓은 너무 얌전해서" 서너겹 겹쳐 구긴 종이나 말린 칡뿌리, 빗자루를 붓으로 삼는다. 강요배는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우선 조도를 느낀다. 어둠과 어스름으로부터 흐리고 맑고 눈부심까지. 동시에 온도를 느끼고 소리를 듣고 질감을 느낀다"고 했다.
강요배는 눈썹이 짙고 볼이 우묵하다. 자신의 그림에서 막 걸어 나온 것처럼 기름기가 하나도 없다. 말수가 적고 눌변에 가깝다. 술을 마셔야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거침이 없다. 그는 "'추상'이라고 하면 모호한 것, 실체나 형체를 알기 어려운 것으로 그 뜻이 굳어졌다. 하지만 한자만 봐도 상(象)을 끄집어낸다(抽)는 의미이고, 영어의 앱스트랙트(abstract) 어원도 '끌어내다'이다. 그래서 추상은 오히려 명확하고 알아보기 쉽다"고 했다. 볕이 줄고 서리 내리기 시작하는 절기를 그린 '상강(霜降)'은 벌건 해 대신 파란 하늘에서 붉게 비치는 구름을 그렸다. 뜨겁지 않다. 상강처럼 서늘한 날, 해 질 녘 온도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다 추상이에요. 인생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진 찍듯이, 스캔을 하듯이 모든 것을 안고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기억이 나지 않으면 안 나는 대로 살죠.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만 끝까지 남아 있으면 되는 겁니다."
1부와 2부로 나누어 여는 대형 전시다. 1부 '상을 찾아서'는 17일까지, 역사화를 한자리에 모은 2부 '메멘토, 동백'은 22일부터 7월 15일까지 열린다. (02)739-4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