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서울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 뒤 후미진 골목. 김시덕(43)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가 저 멀리 한 곳을 가리켰다. 광복 직후 지어진 낡은 1~2층 집들, 20~30년 된 3~4층의 빌라와 꼬마 빌딩, 2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들과 전면이 유리로 덮인 타임스퀘어 빌딩이 차례로 나타났다.
"저는 도시의 화석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땅 아래에 지층이 있다면, 땅 위에는 시층(時層)이 있습니다. 시층을 따라가다 보면 시민들이 부대끼며 살아온 진짜 서울의 모습을 볼 수 있죠."
많은 사람은 서울 하면 사대문과 궁들을 떠올린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김시덕 교수는 발끈한다. 일본학과 한국학을 연구하는 문헌학자인 김 교수는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바라본 서울'을 기록하고 있다. 문화 유적지뿐 아니라 아파트 단지와 빈민가, 유흥가 등 생활 터전을 찾았다. 최근 이 내용을 모아 '서울선언'이라는 제목의 책도 냈다.
김 교수가 서울을 기록하게 된 것은 학내 갈등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김 교수는 일본의 권위 있는 학술상을 받는 등 일본 문헌학계에서 인정받아 2013년 서울대 규장각 소속 교수로 채용됐다. 작년 재임용 과정에서 서울대 인문대 측은 "연구 실적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며 불가를 통보했다. 심사의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고, 김 교수가 서울대 출신이 아니어서 차별을 받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는 고려대 일어일문학과 학부와 석사를 거쳐 일본 국문학 연구 자료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본부가 재심사를 지시했고 결국 재임용됐다. 김 교수는 "어려운 일을 겪고 나니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며 "떠나기 전 서울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었고, 화를 삭이려 서울을 무작정 걸었다"고 했다.
걷다 보니 그동안 보지 못한 것들이 보였다. 그는 "사람들은 사대문 안의 궁궐 등 '조선시대' 유적만 찾아다니고, 일제의 잔재와 미군의 흔적은 외면하거나 지우려 한다"며 "그렇게 해선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볼 수 없다"고 했다.
2015년 청량리에 있던 경성제국대학 예과 건물은 식민지 시절 조선총독부가 세운 건물이라는 이유에서 철거됐다. 김 교수는 "찬란한 역사만을 찾으려 하지 말고, 초라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서울 모습을 들여보자"고 했다. 예컨대 서울 풍납토성엔 4~5세기 백제 유적, 그 옆엔 조선시대쯤부터 형성된 마을들 그리고 고층 아파트들이 모여 있다. "낡은 건물과 마천루가 뒤섞여 흉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직한 서울의 모습은 따로 없습니다. 있는 자체의 서울을 인정하고 바라봐야 합니다."
김 교수는 "누구든 기록하고 남겨야 한다"고 했다. 김 교수도 휴대전화 하나 들고 가방만 둘러맨 채 서울을 누빈다. 그는 "시민들이 주변 일상에서 서울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게 돕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