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침의 대표 메뉴들. 위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오리 볶음밥, 피시 덤플링 락사, 새우커리.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태국 음식을 잘하기 위해 꼭 태국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것을 증명한 남자는 호주 출신 요리사 데이비드 톰슨(David Thompson)이다. 우연히 방콕으로 여행을 간 뒤, 20여 년간 오로지 태국 음식에 몰입한 그는 방콕에 고급 태국음식점을 냈다. 이름은 남(Nahm)이다. 호주 백인이 서울 사대문 안에 최고급 한정식집을 차린 셈이다. '남'은 매년 열리는 '세계의 최고 레스토랑 50개' 같은 순위에 늘 이름을 올린다.
그가 근래 세계 각지에 문을 열고 있는 롱침(Longchim)은 길바닥 음식에 초점을 맞췄다. 시드니, 멜버른에 이어 지난 4월 롱침의 다섯 번째 분점이 서울 홍대 라이즈 호텔에 문을 열었다. 세계 최강 태국 음식 '덕후' 톰슨의 태국 음식에 대한 사랑과 야심이 한국에 상륙한 것이다.
롱침은 여러모로 전형적인 태국음식점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다. 첫째는 위치다. 국내에서 태국 음식은 연남동을 위시한 홍대 뒷거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말인즉슨 그리 고급인 적이 없었다. 지갑 가벼운 젊은 층을 상대로 태국 여행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용도였다. '태국에서 먹던 거랑 비슷하네'란 말을 듣기 위해 존재하는 대체품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상륙한 롱침은 홍대 입구에 새로 문을 연 라이즈 호텔 4층에 있다. 양쪽으로 뚫려 있는 호텔 로비에는 검은 정장 대신 청바지를 입은 종업원이 지중해에 뜬 태양처럼 활짝 웃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올라가니 롱침이란 간판이 보였다. 그곳은 허술한 집기들을 얼기설기 모아 현지 분위기라고 퉁치지 않았다. 대신 런던 소호 거리의 나이트클럽에 온 것처럼 어둡지만 화려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나이트클럽처럼 어두운 롱침의 실내 디자인.
"저는 마이클입니다. 필요하신 것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자리에 앉자 수염을 기르고 단단한 체격을 가진 남자가 역시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외국처럼 테이블에 전담 종업원이 배정됐다. 음식 맛을 차치하고 일반 한국 레스토랑과 롱침이 가장 다른 점은 서비스였다. 그 친절함을 정확히 말로 설명하긴 어렵다. 하지만 조금 부끄럽더라도 먼저 웃어주고 먼저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봐 주는 태도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종류였다. 그들의 인사와 질문을 받을 때마다 외국 레스토랑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간단히 '스타터(starter), 수프(soups), 샐러드(salads), 볶음(stir fries)' 등으로 나뉜 메뉴판도 익히 본 한국 타이 레스토랑과 달랐다. 요리사들의 기합과 가스불의 열기가 그대로 뿜어져 나오는 오픈 키친 앞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 요리사와 백인 요리사가 합을 맞추며 음식을 냈다. 곧 요리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한국의 어묵과 비슷한 '피시케이크'는 생선을 으깨고 뭉쳤다는 맥락만 비슷했을 뿐 맛의 형상은 익숙함을 거부했다. 쫄깃한 식감은 덜했지만 대신 맵고 짠 열대의 맛은 기세등등했다. 덧붙인 오이 샐러드는 그 열기를 낮추는 진정제 역할을 했다.
흔히 '얌운센'이라고 부르는 '글라스 누들 샐러드'는 젓가락으로 들어 올릴 때부터 향이 달랐다. 동남아 특산인 카퍼 라임(Kaffir lime)을 비롯해 익숙한 라임(lime), 쥐똥고추 등 열대의 향신료가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투하됐다. 다듬어지지 않고 길들지 않은 열대 맛은 작은 칼을 들고 정글을 헤집는 용병 같았다. 라임의 날카로운 신맛과 쥐똥고추의 뜨거운 매운맛이 투명한 녹두국수를 실마리 삼아 위장 속으로 침투했다. 코코넛 크림과 강황이 잔뜩 들어간 새우 커리는 생강을 닮은 갈랑갈(galangal), 레몬 그라스(lemon grass) 등 열대 향신료가 잔뜩 들어가 불교의 만다라를 보는 듯한 알쏭달쏭한 쾌감이 혀를 시작으로 척수를 타고 흘러내렸다.
간장과 설탕을 태우듯이 졸인 소스에 절이고 구운 닭 날개는 열대의 더위를 닮았다. 작은 뼈를 떼어내고 탄력 있는 살을 씹을 때마다 끈끈하게 떨어지는 땀, 살 깊숙이 배는 더위, 모든 것이 졸여지고 응축된 듯한 냄새, 얽히고설킨 나무의 줄기와 뿌리를 보고 느끼는 것 같았다. 오리 볶음밥은 오이와 쪽파를 고추와 함께 볶아냈는데, 기름의 고소함을 뒤덮는 라임의 공격적인 신맛이 명쾌했다. 근래 먹어본 볶음밥 중에서 가장 개성 있고 힘 있었다.
피시 덤플링 락사는 이제껏 한국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맛이었다. 땅콩을 갈아 넣은 고소한 단맛과 은근히 느껴지는 생강과 고추의 매콤한 통감은 미들급 복서의 원투펀치처럼 정확하고 간결하게 입안을 메웠다. 이 모든 요리는 향신료의 예술이었다. 톰슨 요리사 본인의 개성과 목소리를 담기보다는 태국이란 나라가 가진 기후와 땅,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증언이었다. 또한 철저한 외부인이 객관적이면서도 편애가 가득 담긴 시선으로 이룩한 작은 왕국이었다. 그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한가로운 마음으로 찾아온 뜨내기 관광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문을 통과한 이는 시민권을 얻으리라. 작지만 맹렬하고 단호하지만 뜨거우며 집요하지만 열려 있는 새로운 태국 음식의 왕국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