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6.18 01:03

詩歷 60년, '의사 시인' 허만하… 시집 '언어 이전의 별빛' 출간

서정시와 형이상학의 만남을 빚어온 허만하(86) 시인이 신작 시집 '언어 이전의 별빛'(솔출판사)을 냈다. 부산 고신대 의대 교수(병리학과)를 지내며 창작 활동도 병행해온 허 시인은 "창 너머 아파트 건물 틈새로 조각난 바다와 광안대교가 보이는 조그만 방에서 시를 쓰고 있다"고 했다.

허 시인은 1957년 등단해 1969년 첫 시집 '해조'를 낸 뒤 '의사 시인'으로 활동했지만 1997년 정년 퇴임하고 나서 1999년에서야 두 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를 펴내 사실상 30년 만에 전업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잊힌 시인이었지만 놀랍게도 뒤늦은 전성기를 누려 왔다. 투명한 언어와 농익은 관념의 조화를 원숙하게 다룬 솜씨로 3~4년에 한 권꼴로 낸 시집이 여섯 권이 되는 동안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비롯해 8개 문학상을 받았다.

40년간 병리과(病理科) 의사로 활동했던 허만하 시인은 “시가 예술의 중심이듯 병리학은 의학의 고전적 중심”이라고 말했다.
40년간 병리과(病理科) 의사로 활동했던 허만하 시인은 “시가 예술의 중심이듯 병리학은 의학의 고전적 중심”이라고 말했다. /김동환 기자
최근 5년 만에 일곱 번째 시집을 낸 시인은 수록작 중 시 '시간 이전의 별빛처럼'을 가리키며 "이번 시집의 총체적 상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의 관념은 흐르지 않는다'라며 '시간 이전의 별빛처럼 최초의 표현을 위하여 보일락말락 섬세하게 떨고 있을 뿐이다'고 노래한 작품이다. 시인은 그 '최초의 표현'을 찾는 자신의 시학(詩學)을 대표하는 이미지에 대해 "인적 미답의 설원(雪原)이 순결의 은유로 동원된다"고 했다. '설원의 끝을 바라보는 얼굴을 후려치는 눈송이의 감촉, 설원은 나의 피부'라는 시행이 대표적이다. 시인은 "지구에 인간이 깃들기 이전의 시원(始原)은 인간의 인식과 수사(修辭)를 거절하는 위대한 수수께끼로 살아 있다"며 "섬세하게 떠는 언어는 표현 불가능한 시원 앞에서 전율하는 인간 정신"이라고 덧붙였다.

시인의 또 다른 키워드는 '수직'이다. '지구의 중심을 향해 돌처럼 떨어지는 새'를 떠올리는 언어로 '존재의 본질이 담긴 심연의 깊이'를 가늠하거나 수평선조차 '물은 온몸으로 일어서려고 다시 쓰러지고 있다'는 기하학적 상상력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신작 시집을 통해 '밤새 사나웠던 폭풍우 지난 뒤의 민 낯 바닷가에서, 허리를 굽혀 자기 운명의 표류물을 줍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라고 시작한 시 '맨발의 바다'로 근황이 담긴 자화상을 그려내기도 했다. 시집 해설을 쓴 유성호 교수(한양대)는 "언어 자체에 대한 철학적이고 본질적인 탐색과 함께 우리 시단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일종의 형이상학적 전율이 두루 착색돼 있다"고 평했다.

시인은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 사이 30년의 간극에 대해 "의사로 활동하면서도 시 쓰기를 중단한 적은 없다"며 "지하의 갱 안에서 일하는 광부처럼 그늘에서 시 쓰기를 지속하며 시의 정체에 대해 생각했다"고 되돌아봤다.

어느덧 시력(詩歷) 60년이 넘은 시인에게 '시란 무엇인가' 물었더니 "사물 보기와 감정 발견에 있어서 자기 생각과 일치할 때까지 다듬어진 언어 표현"이라며 "시는 표현하지, 전달하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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