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들린 번(21)은 갤러리 천장에 매달린 길이 17m짜리 비행선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얇은 은색 필름으로 만든 비행선은 거대한 총알 같다. 은색으로 칠한 바닥에 비행선과 관람객의 모습이 함께 비쳤다. "크고 빛나는 유선형 물체라니, 아름답지 않나요? 하지만 손끝으로 찌르면 터질 것 같아서 무섭기도 해요."
기술의 아름다움과 공포를 함께 보여준 이 작품은 설치작가 이불(54·작은 사진)이 2016년 시드니 비엔날레에서 첫선을 보인 'Willing to be vulnerable'. 20세기 초 수소와 헬륨 비행선을 만든 제플린사(社)의 힌덴부르크호(號)를 본떠 만들었다. 1937년 당시 세계 최대의 비행선이었던 힌덴부르크호는 미국 뉴저지 상공에서 폭발을 일으켜 100명에 가까운 승객 중 36명이 숨졌다. 좌절로 끝나고만 인간의 열망이 비행선처럼 전시장을 부유하고 있었다.
이불의 특별전 '이불:크래싱'(Crashing·충돌)이 개관 50주년을 맞은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영국 국립 사우스뱅크센터에 있는 헤이워드 갤러리는 1968년 앙리 마티스 전시로 개관했다. 1988년 백남준에 이어서 두 번째로 열리는 한국 작가의 개인전. 홍익대 미대를 나와 1987년 데뷔한 작가는 세계무대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2012년 도쿄 모리미술관, 2013년 룩셈부르크 현대미술관,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에 이어 2015년 파리 팔레 드 도쿄, 2016년 시드니 비엔날레에 초대됐다.
80년대 후반 이후 30년 작업을 보여주는 회고전이다. 총 118점의 작품이 3층짜리 갤러리 전체를 채웠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서 이 전시를 크게 다뤘고, 더 타임스는 "흥미롭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은 전시"라며 별 다섯 개 만점 중 네개 반을 줬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관람객들은 천장에 매달린 작가의 대표작 '사이보그'를 보기 위해 일제히 고개를 든다. 일본 만화에 나올 법한 사이보그가 그리스 고전 조각처럼 매끈하게 만들어졌다. 그 옆 전시장에는 80년대 후반 작가가 누드로 밧줄에 거꾸로 매달리거나('낙태') 오징어처럼 팔다리가 여러 개 달린 의상을 입고 도쿄 시내를 활보했던('수난유감―당신은 내가 소풍 나온 강아지인 줄 알아?') 퍼포먼스 비디오를 볼 수 있다. 7개월짜리 딸을 데리고 온 올가 데비아주는 "여성이나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치열하게 탐구한 작품이 많아 좋다"며 "퍼포먼스는 충격적이지만 작가 의도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박종철 고문치사를 은유한 작품이나 벙커 체험을 할 수 있는 작품에도 관심을 보였다. 제이콥 겐트리는 "미·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BBC에서 한국 뉴스를 많이 봤다. 이 전시를 보면서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다"고 말했다.
화재(火災)로 개막이 이틀 미뤄지면서 더 화제가 됐다. 비즈(구슬)를 단 생선 작품 '화엄'이 상하면서 발생한 가스 때문에 작품에 불이 붙었다. 이 작품은 냄새 때문에 1997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 전시 당시 조기 철거당했다. 랄프 루고프 헤이워드 관장은 "이불은 이 화재로 또 하나의 전설을 썼다. 작품이 자연 연소를 하다니 정말 이불 작품스럽다"며 웃었다. "50년 전 헤이워드 갤러리는 백인 남성인 마티스의 전시로 문 열었고, 지금은 이불의 전시로 50주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두 작가는 시대도, 인종도, 성별도 다릅니다. 하지만 마티스가 가졌던 대담한 시각, 위험을 무릅쓴 도전 정신과 창의성은 이불에게도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