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란덴부르크 공국(公國)의 작은 수도였던 베를린은 1701년 프리드리히 1세가 프로이센 왕국의 초대 왕으로 즉위해 왕국 수도로 선포하면서 유럽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우뚝 섰다. 베를린의 약진엔 선진 기술을 지닌 외국 인재를 적극적으로 유치한 프로이센 제왕들의 노력이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공국 말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공은 프랑스가 신교도 위그노들을 탄압하자 그들에게 특별 대우를 약속하는 칙령을 반포하며 이민자 유치에 나섰다. 염색·섬유 분야 수공업자였던 위그노들을 불러들인 선택은 베를린을 유럽 섬유 산업의 중심지로 탈바꿈시켰다. 게다가 위그노가 들여온 커피와 정원 문화 덕에 베를린은 '북쪽의 아테네'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프리드리히 대왕 때는 베를린과 포츠담의 상수도 건설을 위해 네덜란드 기술자들도 대거 불러들였다. 오늘날 포츠담에는 '네덜란드 구역'이라는 빨간 벽돌로 지은 아름답고 이국적인 관광 거리가 있는데, 이곳이 당시 네덜란드 이주민을 위한 공동주택지였다. 18세기 프로이센은 이처럼 '이방인을 사랑한 나라'였다. 베를린의 18세기는 독일인만의 도시를 만들겠다며 외국인과 유대인을 몰아냈다가 몰락한 20세기 초 나치의 어두웠던 역사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이 책은 1996년 창립한 한국 18세기학회 소속 학자 25명이 참여해 만들었다. 학자들이 18세기 세계 각국 도시를 주목하게 된 것은 이 시기에 유럽 각국에서 산업혁명을 바탕으로 현대적 도시화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산업 생산의 비약적 증가라는 물적 토대와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던 계몽주의가 결합해 오늘날 유럽 도시들을 형성했다. 파리 인근의 베르사유궁과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궁은 이전 시대와 다른 도시를 만들고 싶어 했던 유럽인들의 열망이 구현된 건축물이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궁을 짓고 파리를 떠난 것은 17세기까지 이 도시의 도로가 부러진 나뭇가지를 덧댄 것처럼 너덜너덜해 마차가 달리기 어렵고 군대 행군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 도시에선 일자리를 찾아 몰려드는 시골 사람들이 닭장 같은 방에서 비위생적으로 살았고, 거리는 오물 냄새가 가득했다.
이미지 크게보기18세기 에든버러 전경을 파노라마 기법으로 담은 사진. 구도시와 신도시가 조화를 이룬 에든버러는 계몽주의 시대정신의 표상이었다. /문학동네
루이 14세는 베르사유궁을 지으면서 궁정 뒤 정원에 투시도 기법을 바탕으로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축선을 따라 시원하게 뚫린 대로를 설치했다. 이런 정원 조경을 통해 파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를 그렸던 것이다.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를 낳은 도시 에든버러의 신시가지 역시 계몽주의와 산업 발전의 산물이다. 에든버러 신시가지 구상은 1766년 도시계획 공모를 통해 확정됐는데, 동서로 뻗은 대로를 중심으로 남북 방향의 통행로를 낸 근대적 격자 구조였다. 지성의 도시 에든버러에서 당시 장사가 가장 잘되는 업종은 인쇄·출판·서점이었다. 18세기 중반 5곳에 불과했던 제지 공장도 세기 말 260곳으로 늘었고, 신문 부수는 3배로 커졌다.
저자들은 18세기 여행 붐을 타고 부활한 온천 도시 바스, 르네상스 도시에서 축제 도시로 거듭난 베네치아, 모국인 영국과 새롭게 탄생할 미국 사이에서 갈등했던 식민지 시기 뉴욕, 시베리아의 유럽 도시 이르쿠츠크 등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자카르타, 방콕의 18세기는 생소하면서도 신선하다.
책 후반부에 실린 조선 도시들의 18세기 풍경을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당시 조선은 환경 친화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설계로 수원 화성을 건설한 잠재력 있는 국가였다. 그러나 정작 수도 서울은 취기로 흥청댔다. 정조 후기 문신 이면승은 "골목이고 거리고 술집 깃발이 이어져 거의 집마다 주모요 가가호호 술집"이라며 "소송이 빈발하고 풍속이 퇴폐해지는 현상은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 같은 시기 장인(匠人)의 활약으로 수공업이 발달하고, 문물이 융성했던 '도쿄' 편과 비교해 읽으면 안타까움이 배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