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애물단지처럼 여겨졌다. 요즘엔 일부러 찾아다니는 명소로 각광받는다.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 살던 일본인들이 1945년 패망하자 남겨놓고 떠난 집과 건물을 뜻하는 적산가옥(敵産家屋) 얘기다. 적(敵)이 남기고 간 재산이란 뜻만큼이나 아픈 역사를 응축한 건물이지만 요새는 이를 복원해 완성한 카페나 게스트하우스, 문화 공간이 새롭게 각광받는다.
적산가옥 중 상당수는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문화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거나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건물은 관리조차 제대로 안 돼 한때는 골칫거리처럼 취급됐다. 이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게 최근 1~2년 사이다. 특유의 옛 정취, 고졸한 멋으로 10~20대가 열광하기 시작해서 더욱 그렇다. 이들은 요즘 적산가옥 카페나 갤러리가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 멀어도 찾아간다. 이런 바람을 타고 전북 군산과 전남 목포 주변에만 몇 곳 주목받던 적산가옥은 어느덧 전국 곳곳에 새로 단장해 문을 열기 시작했다. 군산·목포는 물론, 서울·경기·인천·강원·부산·제주 곳곳에서 사람들을 새롭게 불러 모으고 있다.
부산 동구 망양로에 있는 카페 '초량1941'은 최근 인스타그램·페이스북을 통해 빠르게 소문을 탄 곳이다. 1941년 일본인 스나가와 기쿠지가 지은 건물로, 애초엔 별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산 토박이 주인이 1996년 인수할 때만 해도 이 건물은 쓰러져가는 애물단지였다. 2년 넘게 수리하고 다듬은 끝에 카페로 열었다. 뜻밖에도 개장하자마자 10~20대 여행객 사이에서 크게 유명해졌다.
제주시 관덕로‘순아커피’(위)와 부산 동구 망양로 카페‘초량1941’(아래). 청춘남녀들은 이곳 다다미가 깔린 방에서 음료를 마시거나 비좁은 일본식 계단과 복도에서 사진을 찍는다. /송혜진 기자·김동환 기자
작년 문을 연 부산 동구 수정동의 '문화공감 수정'도 인기다. 본디 '정란각'이라는 이름의 일본식 가옥이었던 건물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3년간 7억여원을 들여 고쳐서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로 새로 문을 열었다. 최근 아이유의 뮤직비디오에 나오면서 요즘엔 새로운 나들이 장소로 각광받는다. 주말이면 이곳에서 사진 찍고 노는 10~20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제주 제주시 관덕로에 있는 '순아커피'도 요즘 제주도 찾는 젊은 여행객이 반드시 들르고 가는 장소다. 지은 지 90년이 넘은 것으로 알려진 이 2층 가옥은 본래 '숙림상회'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1층에선 잡화를 팔았고 2층엔 주인이 살았었다. 이 건물을 조카가 물려받으면서 카페로 개조했다. 1층과 2층은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된다. 이층 방엔 일본식 장판인 다다미가 깔려 있다. 청춘남녀들은 요즘 이곳 이층 방 소반에 앉아 미숫가루와 커피를 두고 인증샷을 찍는다.
전남 목포에 있는 카페 '행복이 가득한 집', 1885년 지어진 일본식 가옥을 개조한 인천 중구 신포로 카페 '팟알', 역시 100년쯤 된 일본식 가옥을 고쳐 만든 강원 강릉시 명주동 '오월 카페', 일제 강점기 전남 나주시 지주였던 일본인 구로즈미 이타로의 주택을 개조해 만든 나주시 영산동의 '다향카페', 대구 이천동 카페 '고아옥' 등도 최근 부쩍 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은 "이 땅에서 시간과 역사를 흡수한 건축물을 송두리째 허물지 않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 보존한다는 점에선 긍정적인 유행으로 여겨진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