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6.21 13:13

버릇하나 생겼습니다. 거리를 걷다가 산책을 하다가 시선을 빼앗기면 사진부터 찍습니다. 미세먼지 풀풀 일어나는 거리에서 보도블록을 비집고 피어나는 꽃 한 송이에서도 시선을 뺏기고 마음을 뺏깁니다. 시선과 마음을 뺏겼으니 당연히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야 맙니다.

어제는 산책하다가 그만 패랭이꽃에 마음을 뺏겼습니다. 산비탈 양지쪽에 있어 몇 걸음 산에 올라야 했습니다. 약간의 보랏빛이 감도는 진분홍색 꽃이었습니다. 어떻게 찍으면 예쁠까 꽃 주변을 빙빙 돌며 내려다보고 올려다보고 부산을 떨었습니다. 누가 보면 대단한 포토그래퍼라도 된 양 패랭이꽃에게 ‘날 봐, 날 봐’ 온갖 아양을 떨어가며 찍었습니다.

찍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폼이란 폼은 다 잡습니다. 내려다보며 찍다가 올려다보며 찍다가 결국을 무릎을 꿇고 허리까지 숙이고 찍었습니다. 예전이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 두리번거리다 후다닥 찍곤 했는데 이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습니다. 아마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땅바닥에 엎드려서 찍는 것도 불사할 거란 생각이 듭니다. 누구 눈치를 볼 것도 없고 부끄러워질 이유가 점차 사라지는 걸 보면 말입니다.

요리조리 뜯어보고 만져보고 야단법석을 떨고 나면 엉거주춤 사진을 들여 봅니다. 어느 때는 ‘에이, 이게 뭐야!’ 한탄이 저절로 나오고, 어느 때는 ‘그럼, 그렇지,’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그 순간만 큼은 세상에 부러울 게 없습니다. 부러울 게 없으니 우쭐해서 자랑 좀 해야겠지요. 친구들 모임방에 부리나케 올립니다. 반응은 다양합니다. ‘이쁘다.’에서 ‘야아~~ 중병이다, 중병. 그래도 꽃은 이쁘다, 잘했어 ^^’라는 함박꽃 같은 웃음을 보내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들꽃 사진 하나로 보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행복한 시간입니다.

새로운 꿈이 하나 생겼습니다. 일기를 쓰듯 하루하루 다르게 다가오는 떨림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퇴직 후에는 어제와 오늘이 거기서 거긴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음속에 떨림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 떨림을 기록하고 싶어 졌습니다. 사람의 기억이란 세월의 흐름 앞에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제 어머니나 아버지를 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썼던 일기들을 들춰보면 보잘것없었던 이야기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 사 그 가치를 느끼기 때문이지요.

아파트 옥상 텃밭에 서성이다가, 메마른 도심의 거리를 걷다가 내 시선을 끌어당기고 마음을 빼앗는 것들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기록이라 하니 뭐 거창한 거 아닌가 하겠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 혼자 쓰는 카페에 ‘휴대폰 사진관’이라는 팻말 하나 걸 수 있는 작은 방하나 마련하면 그뿐입니다. 꿈이란 게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건 압니다. 꼭 이루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생각하나 가슴에 품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시작했습니다.

황혼 길을 걷는 연인들이 밤바람 살랑이는 공원에서 데이트가 한창입니다. 누구에게나 쉬어 갈 그늘을 만들어주는 따뜻한 품성, 우직함과 진중함을 갖춘 남자와 오만하지만 상식적인 언행. 싹수없지만 정도는 넘진 않고, 독설을 퍼붓지만 듣고 보면 모두 옳은 말들을 쏟아내는 여자와,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사랑 얘기가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이 나이 먹도록 밤바람 살랑이는 공원을 둘이서 걸어  본 기억이 제겐 없습니다.

해 본 것보다 해보지 못한 것이 더 많은 삶이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과 해 본 것들이 오늘 밤, 꿈으로 날아오릅니다. 언젠가는 드라마에 나오는 저 풍경도 만들어지는 날이 있겠지요. 지금은 우선 하고 싶은 것을 해 봐야겠습니다. 그러면서 엄지를 치켜세우고 외칩니다.‘ 예쁜 것들아, 여기, 여기 붙어라!’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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