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산업을 주도해왔던 인텔이 흔들리고 있다. 모바일 시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세계 1위 반도체 기업 자리를 삼성전자에 내준 데 이어 AI 반도체·자율주행차용 반도체 등 미래 기술 분야에서는 엔비디아·퀄컴 등 반도체 기업부터 구글·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MS) 등 IT(정보기술) 기업들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한 상황이다. 여기에 인텔의 변혁을 주도해왔던 브라이언 크러재니치 최고경영자(CEO)도 지난 21일(현지 시각) 사내 여직원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드러나 갑작스레 사임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인텔이 리더십 부재라는 덫에 걸린 사이, 다른 기업들이 속속 치고 나올 것"이라고 보도했다.
◇세계 2위로 밀려난 인텔
인텔은 1968년 미국 산타클라라에서 창업한 이후 2016년까지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 자리를 놓친 적이 없었다. 인텔의 CPU(중앙처리장치)는 세계 모든 PC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부품이었고, 여기서 쌓은 기술력으로 서버용 CPU 시장에서도 독점적인 지위를 장악했다.
이런 인텔은 2000년대 말 모바일 시대가 도래하면서 급속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통신칩 전문 기업이던 미국 퀄컴은 스마트폰의 CPU라고 불리는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를 개발해 삼성전자·LG전자·화웨이 등 세계 스마트폰 업체들을 선점하면서 'CPU=인텔'이라는 공식이 깨졌다. 이는 인텔의 실적 둔화로 이어졌다. 세계 반도체 시장 매출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던 인텔은 작년 삼성전자에 1위 자리를 빼앗겼다.
크러재니치는 인텔이 흔들리던 2013년 CEO로 선임됐다. 1982년 인텔에 입사해 30년 넘게 엔지니어로 근무한 크러재니치는 CPU에 매출의 90% 이상을 의존했던 인텔의 체질을 AI·자율주행차용 반도체 기술 기업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2015년 사물인터넷·자동차 반도체 기업인 알테라를 167억달러(약 18조6600억원)에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2016년에는 AI 기술 기업인 네르바, AI 반도체 기술 기업인 모비디우스를 인수하고 발 빠르게 체질 개선에 나섰다. 작년에는 최고 자율주행차 기술 기업 중 하나로 꼽히는 이스라엘의 모빌아이를 153억달러(약 17조1000억원)에 인수했다. 하지만 크러재니치가 갑자기 CEO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인텔은 미래의 성장 동력을 발굴해왔던 선장을 잃은 것이다.
◇미래 반도체 기술 패권 노리는 기업들
인텔이 흔들리는 틈을 타서 세계 반도체·IT기업들은 반도체 기술 패권을 쥐기 위한 도전에 나섰다. 세계 최대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대만의 TSMC는 이미 10나노(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7나노 공정을 상용화하면서 반도체 제조 기술력을 선도하고 있다.
반면 인텔은 빨라야 내년에 10나노급 공정으로 양산을 시작할 것으로 예상된다. AI 반도체 등으로 대표되는 미래 반도체 시장에서도 그래픽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가 AI 반도체와 자율주행차 전용 반도체 칩셋 개발에서 인텔을 앞서나간다는 평을 받는다. 구글·아마존 등 IT 기업들도 자체적으로 AI 반도체를 설계하면서 반도체 독립을 추진 중이다. 인텔은 최고재무책임자(CFO)였던 로버트 스완을 임시 CEO로 선임하고 현재 새로운 수장 찾기에 나섰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인텔이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다면 세계 IT 산업의 두뇌 역할을 해왔던 인텔의 자리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