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들라크루아의 '구렁이 파이톤을 물리친 아폴론'이 그려진 아폴롱 갤러리의 천장을 카메라가 훑고 지나간다. 공중을 부유하던 카메라가 머무는 곳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 앞에 힙합 가수 제이지와 비욘세 부부가 서 있다. 이들의 입에서 랩이 흘러나오고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스의 승리의 여신',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등 루브르 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이 하나씩 카메라에 비춰진다.
지난 16일 공개된 제이지와 비욘세의 뮤직비디오 '에이프쉿(Apeshit)'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촬영했다. 사흘 만에 조회수가 2000만이 넘었다. 주간지 타임은 루브르 박물관이 이들에게 촬영 허가를 내준 것만으로도 '기념비적'이라고 했다. 지금껏 패션계와 어울리던 힙합이 이제 미술계와 결합하고 있다. 힙합 가수들이 미술관에서 뮤직 비디오를 찍고, 경매장에서 새 앨범을 발표한다.
◇'서양미술의 요새'에 들어간 힙합
제이지가 자신의 뮤직비디오에 미술을 활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13년 뉴욕 3대 갤러리로 꼽히는 페이스 갤러리에서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함께 '피카소 베이비'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다. 비욘세가 2014년 자택에서 찍은 뮤직비디오에는 벽에 걸린 리처드 프린스와 데이비드 해먼즈의 작품이 보인다. 자산이 1조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 이 부부는 피카소,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 조지 콘도 등의 작품을 갖고 있는 '수퍼컬렉터'다.
주간지 뉴요커는 "돈을 많이 번 힙합 가수들이 보석, 시계, 자동차나 비행기로 부를 과시하지만 제이지와 비욘세는 그보다 한 차원 높은 미술품으로 자신들의 부와 영향력을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이 굳이 루브르 박물관을 택한 이유에는 정치적인 배경도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유럽 문화의 요새인 루브르 박물관에서 흑인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뮤직비디오 첫 장면은 이 부부가 모나리자 앞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백인 여성인 모나리자는 서양에서 미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작품이다. 뮤직비디오 중간에는 프랑스 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 앞에서 비욘세가 여성 댄서들과 피부색을 다 드러낸 옷을 입고 군무를 춘다.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라 선언하고 아내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이 그림은 백인들로 가득 찼다. 백인 중심으로 쓰인 서양 미술사에 대한 일종의 항의인 셈이다.
◇흑인 작가들까지 덩달아 뜬다?
힙합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미술계에서도 힙합 가수들을 반긴다. 에이셉(ASAP) 라키는 지난 5월 20일 뉴욕 소더비에서 새 앨범을 발표했다. 랩랫(Lab Rat)이란 90분짜리 행위 예술도 선보였다. 에이셉 라키는 '아티스트'라는 이미지를, 소더비는 세련되고 젊은 이미지를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NYT도 루브르가 제이지와 비욘세에게 촬영 허가를 내준 것도 홍보 효과 때문이라고 봤다.
힙합계가 미술에 관심을 가지면서 흑인 작가들도 같이 부상하고 있다. 지난 5월 소더비 경매에서 케리 제임스 마셜의 '지나간 시간들'이 228억원에 팔려 현존 흑인 작가의 최고 경매 기록을 세웠다. 작품을 산 사람도 힙합 가수 피디디였다. 시카고 출신 마셜의 작품은 미셸 오바마 전(前) 미국 영부인과 제이지 등 흑인 명사들이 소장하면서 유명해졌다. 지난해 베네치아 비엔날레 미국관 작가인 마크 브래드퍼드 역시 흑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