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위적인 찬 바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웬만하면 선풍기도 잘 틀지 않고 여름을 지내는 편이다. 당연히 우리 집엔 에어컨이 없다. 지대가 높아서인지 현관문을 열고 미닫이 방충망 문을 여며놓으면 베란다로 맞바람이 통해 지낼만했다. 그런데 이번 여름은 그게 아니다. 아무리 연중 가장 더운 절기라곤 하지만 며칠 전 대서(大暑)엔 무려 111년(기억하기도 쉽다) 이래 서울의 새벽 기온으로는 최고치인 30도 가까이 기록했다. 잠자기가 참 어려웠다. 경상북도에서는 낮 기온이 40도가 넘은 지역도 나타났건만 무더위는 연일 기세등등하다.
어찌하여 지구온난화를 조금이라도 덜겠다는 명분까지 내세우며 에어컨 설치를 마다했던고. 선풍기에 의지하기엔 결코 만만치 않은 무더위다. 에어컨이 있으면 순식간에 땀은 식지만, 그 찬바람을 벗어나는 순간 아예 숨이 턱 막히는 반작용이 선풍기에 댈 바가 아니다. 선풍기 하나 없이 쪽방에서 지내는 이들, 땡볕에서 일하는 이들도 있는데 묵묵히 견뎌야지, 땀을 뻘뻘 흘리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감사해야지, 더위가 가면 올 한해도 후딱 가버리니 더위조차 아까워해야지. 마음은 그렇게 먹으면서도 당최 집 밖을 나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른바 초열대야로 잠을 설친 다음 날, 도서관 책의 반납일이라서 하는 수 없이 집을 나섰다. 해가 쨍쨍해지기 전에 다녀오려고 아침부터 서둘렀다. 거리에는 나처럼 일찌감치 발길을 재촉하는 이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일면식도 없는 그들 하나하나가 왠지 다시 보이는 것이었다. 나이 든 분들에겐 안쓰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2018년 여름, ‘역대급’ 폭염을 견디고 있는 ‘우리’로서 동병상련의 느낌이랄까. 수년 전 태풍이 통과하며 헝클어놓은 거리에서, 얼마 전 미세먼지 경보가 내린 뿌연 거리에서 스쳐 지난 이들에게 느꼈던 것과 같았다.
새벽에 괴성을 질러 싫은 길고양이도 애처로워 보였다. 길가 에어컨 실외기의 한 뼘 그늘 아래 박혀있었다. 멍멍이들은 어디서 늘어져 있는지 안 보이고, 모기도 맥을 못 춘다니 그건 좋다. 병충해는 되레 기승을 부려 농사에 어려움이 큰가 보다. 문득 플라톤의 한마디가 생각났다. “친절히 대하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는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간다.” 동시대를 살아내려 애쓰는 모든 생명에 불현듯 측은한 마음마저 든다. 재난영화에서 발휘되는 인류애가 떠오른다. 폭염이야말로 어느 한 곳이 아닌 거의 전 대륙에서 날로 최고기온을 갈아치우며 연약한 인간을 위협하는 범지구적인 재난이 아닌가.
가을도 곧 올 거야
실제로 더위는 사람의 신체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뒤흔든다. 기온상승이 폭력을 증가시킨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졌지만, 자살률 증가에도 영향을 준다니 말이다. 얼마 전 미국 연구진은 미국과 멕시코에서 평년보다 기온이 높은 달에는 자살률도 높아지는 상관관계를 확인했다. 평균적으로 춥거나 덥다든가, 월별, 성비, 사회경제적 상태, 총기 접근성, 도시나 시골, 에어컨 보급률조차 자살률과 별 상관관계가 없었다. 기온상승 때 트위터에는 ‘혼자, 차가운, 외로운, 갇힌’ 등의 단어사용이 늘며 정신건강이 나빠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대로 간다면 경기침체로 실업률이 올라갈 때 보다 기온상승으로 인한 자살이 더 많을 거란 예측도 나왔다.
점점 전 세계 동시다발적인 폭염의 원인은 상당 부분 지구온난화 탓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산업혁명 이후 지구의 평균기온이 1도 상승한 것만으로도 현재 초열대야를 겪고 있다면, 금세기말 3도 이상 오를 때 우리 후대들은 어떻게 될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도 “지구상 우리가 마지막 세대라도 되는 양 제멋대로 살고 있다”는 경고가 잘 안 들리는 지금이다. 그 결과, 기후변화가 극단을 달리게 되어선지 요즘은 사회도 사람도 극단으로만 치달아 열을 더한다. 세대갈등에다 이데올로기 갈등, ‘여혐’ ‘남혐’의 남녀갈등까지 난무한다. 지구촌의 일원으로 지구온난화를 막는 근본적인 변화에 전력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에.
큰일이 아니라, 나름 할 수 있는 일을 일상에서 조금씩이라도 실천하려고 마음먹는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탄소배출을 줄이려 노력하는 것이 그 하나다. 자동차며 에어컨이 없는 이유지만, 폭염이 더 심해진다면 구입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과한 에어컨 바람은 지구 이전에 내 몸의 체온조절과 평형감각 문제를 일으킨다니 설정온도를 높이고 많이 틀지 않겠다. 대신 오늘도 그러하듯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힐 것이다. 아파트 복도의 난간 너머로 담벼락까지 비탈진 곳에 무성한 잡풀과 아카시아가 눈에 들어온다. 작은 액자만 한 녹색에도 눈부터 시원해진다.
그런데 오늘 문을 여는 순간 깜짝 놀랐다. 녹색 속에 숨긴 듯 뜻밖의 빨강이 눈에 얼핏 비쳤다. 뭐지? 난간에 허리를 구부리고 가까이 들여다보니 복숭아가 아닌가. 사람 손이 닿을 수 없는 가파르니 후미진 곳, 이따금 위층에서 던진 쓰레기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던 터라 자세히 볼 일이 없는 곳이었다. 그런 데서 홀로 자라나 더위도 아랑곳없이 주렁주렁 주먹만 한 열매를 달고 하나씩 발갛게 물들여가고 있다니! 현관문을 여닫을 때마다 살짝 즐기며 그래, 나도 뭔가 익어가게 해야지. 가을도 곧 올 거야. 갑자기 분수처럼 희망이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