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사산비명 마지막은 경주 초월산(初月山)의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이다. 대숭복사비는 최치원의 사산비명이 대체로 선사들의 탑비인 것과는 달리 왕실에서 세운 절에 대한 기록으로 신라 왕실과 중앙귀족들의 불교신앙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실물(實物)은 파손되어 전하지 않으며 탁본도 없다. 다만 일부 조각(片)이 확인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필사에 의한 문장이 전해져 그 내용은 알려졌으니 다행이다. 비석받침 귀부가 남아 국립경주박물관 본관 앞 야외마당에 전시되고 있다.
쌍거북 비석받침(높이 77, 너비 180cm)
경주 외동읍 말방리의 숭복사 터에 있었던 비석 받침이다. 머리는 용의 형상이나 전체적으로는 거북의 모습이며, 등에는 두 겹의 거북등무늬[龜甲文]가 새겨져 있다. 짧은 목에는 구슬 목걸이가 걸려 있고 등에는 큼직한 비석 받침[碑座]이 있으며, 그 위에는 별석의 또 다른 받침이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설명]
그러니까 숭복사는 경주 외동읍 말방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터만 남아 있으며 그곳에 있던 숭복사비는 무슨 연유인지 파손되어 전하지 않고 있는데 쌍거북 비석받침만 남아 경주 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놓여있는 것이다. 아쉽게도 많은 사람이 이것이 최치원의 사산비명중 하나인 대숭복사비의 유일한 잔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지나쳐간다.
삼국유사에 '원성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기슭 곡사(鵠寺 : 숭복사)에 있으며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어주던 원찰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그 자리에 최치원이 비문을 써서 세웠다는 것이다.
이러한 쌍거북 비석받침은 매우 드문 것이다. 경주 배리(拜里)에 있는 창림사 터와 암곡동 무장사 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숭복사와 함께 이 세 절은 모두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곳이며, 창림사 일대는 박혁거세가 세운 신라 최초의 궁궐터로 알려져 있고, 무장사는 태종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를 숨겼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유추해보건대 신라 사람들이 왕실과 관련된 비석은 좀 더 화려하게 꾸미려고 쌍거북으로 하지 않았을까 싶다.
숭복사 터(崇福寺址)
원래 숭복사는 곡사(鵠寺)라는 이름으로 원성왕릉(괘릉) 자리에 있었다. 이후 왕릉에 자리를 내어주고 말방리로 옮겨와 숭복사로 이름을 바꿨다. 폐사되어 말방리사지(末方里寺址)로 전해져오다가 비편(碑片)이 발견되면서 숭복사 터로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