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9.10 14:24

하루하루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물건 사러 가기, 은행 들리기, 투표하러 가기, 공부하러 가기, 공공 문서 확인하고 출력하기, 생각이나 영상/음성 남기기, 무료해져 놀기, 사람 만나 이야기 나누기 등등 일상생활 대부분을 인터넷을 두드리며 해결하고 있다. 참 편리해진 문명 속에 살고 있다. 이 문명의 중심에 SNS가 있다.

벌써 20년 가까이 활짝 피는 SNS 세상. 이제 집 주소보다 이 SNS 주소를 소중하게 여기기도 한다. 이 주소에 얼마나 익숙한가에 따라 삼삼오오 구분되는 SNS 세상이다. 개인과 개인을 묶어주는 새로운 사회 문명의 꽃이 분명하다. 이 꽃은 다른 꿈을 꾸며 씨앗이 된다. 인류 역사는 이 꽃과 씨앗 사이에 있는 꿈에 의해 순간마다 새로워지고 있다.

SNS 같은 새로운 문명이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필지 모른다. 언제나 그래왔듯, 그 중심에는 꽃을 든 사람의 이름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새로운 힘이 국가보다 더 강한 조직이 만들어졌다. 이 조직은 세계 사람을 모두 같은 느낌으로 승화시키려 하며 지구를 자신들 입맛대로 만들어 가고 있다. 국가보다 다국적기업이 새 문명을 주도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어쩌면 SNS가 돈 자랑의 일시적 수단일 수도 있다는 데 있다. 먼저 세상 일부를 자기 것으로 아는 사람들, 새 문명의 앞줄에 선 사람들, 그 일부는 이것을 무척 즐기며 자신들만의 자본주의 철옹성을 크게 쌓는 수단으로 SNS를 이용한다. 발 빠르게 이것을 먼저 쥐려는 사람들만이, 이러한 환경에 잘 적응한 약삭빠른 사람만이 서로서로 밀고 당기는 사이에 세상 한구석이 그들의 손에 의해 바뀌고 있다. 이는 순식간에 사회 전부가 되기도 한다.

첨단 문명이 발달할수록 너나없이 새것에만 집착한다. ‘인간은 새롭기에 위대하다’는 말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을 뭐라고 할 수 없다. 서로 새로운 가상의 인터넷 땅을 지정해 놓고, ‘함께 할 사람?’ 하고 손들라 하면, ‘나요, 나요!’ 나도 모르게 손들게 되니 말이다. 그러하니, 이 SNS가 잘못 만연된 세상에선 ‘나’가 점점 가치를 잃어갈 수밖에. 끼리끼리 잘 먹고 잘살려는 그냥 위만 존재하는 ‘우리’만이 더욱 강조될 수밖에.

쓸데없는 걱정이 되겠지만, 그러한 SNS가 만든 '우리'만의 세상이란 반드시 바뀔 것이기에,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놓지 않으려는 부작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남용하는 경우다. 다시 다른 세계로 옮겨져야 함에도, 이들이 자칫 잘못 사용되어 혼란을 가중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계속 ‘자신들 세계가 맞고, 그래서 우선이다'는 여론의 끈을 이리저리 끌고 다닐 때다. 이는 새로운 다른 발전을 방해하는 꼴이다. 어느 한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경우를 생각해 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우려는 어느 시대나 있었지만.

그러나 아무리 새 문명이기가 왜곡되어도 다행스러운 것은 ‘사람이란 말이 언제나 행복에 가깝다’는 진리다. SNS가 일반화되고 그 특별함이 없어지는 힘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다행이다. 우리 모두 '내가 사람임을 또 느끼는 일'이란 SNS가 대신할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지나감, 기쁨, 지구, 집, SNS’ 등 어떤 단어도 고만고만한 같은 무게일 것임을 다시 느껴본다. 당연, 짧게나마 새로움이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으리라. ‘그냥 내가 사람이로다!’ 느낄 때 그러할 것. 그때가 ‘내가 그냥 사람이 되는 행복’한 때일 것.

세상의 큰 흐름일지도 모른다며 SNS 애용이 목적인 양 무작정 따라 하기보다는, 나부터라도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SNS를 꼭 필요한 수단의 하나로 활용해야 하리라. 필요에 의해 선택한 삶의 한 수단이 될 때, 새로운 길, 나만의 행복이 잘 보이는 것 아닐까? 수많은 문명이 끊임없이 출현한다 해도 1만 년 혹은 그 이전처럼, 나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 분명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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