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이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라면, 승탑은 유명했던 스님들의 사리를 두는 곳이다. 승탑의 구성은 석탑과 같아서, 기단(基壇)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는다.
이 승탑은 연곡사의 동쪽에 네모난 바닥돌 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연곡사는 고려 전기까지 스님들이 선(禪)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때문인지 이곳에는 이 승탑 외에도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보물 제154호), 구례 연곡사 북 승탑(국보 제54호) 등 2기가 더 있다. 동 승탑은 그중 형태가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이다.
기단(基壇)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위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두 단인데, 구름에 휩싸인 용과 사자모양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든다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 위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뉘어 두 겹의 연꽃잎과 기둥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해 두었는데, 이 부분에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안에 불교의 낙원에 사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새겨둔 점이 독특하다.
탑신(塔身)은 몸돌의 각 면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속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해 두었는데, 그 수법이 그리 훌륭하지는 못하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으며, 기와를 끝맺음할 때 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할 정도로 수법이 정교하다.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겨 아래위로 쌓아 놓았다.
도선국사의 승탑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으며, 일제 때 동경대학으로 반출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단이 좀 높아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감을 잃지 않으면서 훌륭한 조각수법을 보여 있어 통일신라 후기를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재청]
연곡사(鷰谷寺)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에 위치한 연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의 말사이다. 백제 성왕 22년(544)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였는데 절터를 잡을 때 커다란 연못에 물이 소용돌이치며 제비들이 노는 것을 보고 연곡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고려 초기까지는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임진왜란 때에 왜병에 의하여 전소된 뒤 태능(太能, 1562∼1649)이 중창하였다. 1745년(영조 21)에는 연곡사가 밤나무로 만드는 왕실의 신주목(神主木)을 봉납하는 곳으로 선정 후 과도한 요구에 승려들이 피신하기도 했다고 한다.
1907년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이 당시 광양만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정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연곡사로 집결시켰다가 이때 그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에 의하여 고광순과 의병들은 모두 순절하였고, 절은 왜병들에 의하여 방화를 당하였다. 그 뒤 1942년에 다시 중건하였으나, 6·25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됐다. 그 뒤 사찰분규와 교통사정 때문에 재흥을 보지 못하다가 1965년에는 소규모의 대웅전을 시작으로 1981년과 1983년, 그리고 1994년부터 1996년간에 중창불사를 통하여 오늘에 이른다.
즉, 임진왜란 때 왜병이 불태웠고, 일제침략기에는 일본군이 불 질렀으며, 6.25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폐사가 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최근에서야 당우(堂宇)들을 하나씩 둘씩 세워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이야기이다.
동승탑 (東僧塔)
연곡사에는 국보 제53호 동승탑과 국보 제54호인 북승탑이 있는데, 어느 스님의 승탑인지 알 수 없으므로 위치한 방향을 붙여 그리 부른다. 또 다른 승탑인 보물 제154호 소요대사탑 (逍遙大師塔)은 문비(門扉)에 ‘逍遙大師之塔(소요대사지탑)’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누구의 승탑인지 알 수 있기에 서쪽에 있지만 서부도라 하지 않고 소요대사탑이라 부르고 있다.
동승탑은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승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동경대학으로 옮겨가기 위하여 수개월 동안 연구하였지만, 산길로는 운반할 수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기본적으로는 8각 원당형 구조를 갖추었으며 받침대는 하대, 중대, 상대로 구성되어 일반적인 듯 보이지만 네모난 지대석 위에 올린 하대석은 2단으로 되어있다. 두 겹으로 된 아랫단에는 운룡(雲龍)무늬를 가볍지만 복잡하게 새겼고, 윗부분에는 돌출된 윤곽 안에 다양한 모습의 사자(獅子)를 돋을새김하였다.
잘록한 중대석은 다소 낮은 편이며 역시 8각의 각 면에는 안상무늬를 넣고 그 안에 무기를 쥐고 있는 팔부중상을 새겼다. 이처럼 기단부에 팔부신장이 나타나는 것은 9세기경 통일신라시대의 특징이라고 하며, 시대가 내려가면서는 주악천인상과 공양합장상으로 변한다고 한다.
상대석은 두 겹의 앙련(仰蓮)이 큼직하며 연잎마다 꽃모양을 추가로 새겨 화려하다. 다소 둥근 느낌을 주는 상대석은 그 위에 난간모양의 몸돌 받침을 이고 있다. 앙증맞지만 확실한 난간기둥 사이 칸마다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전설의 극락조, 가릉빈가를 새긴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팔각 몸돌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어 안정적인 모습이다. 여덟 면에는 앞뒤로는 자물쇠와 문고리를 표현한 문비(門扉)를 새겼고, 좌우로는 다리 3개에 뚜껑이 있는 향완(香垸)을 새겼으며 나머지 4곳에는 무장형(武將形)의 사천왕상을 새겼다. 전체적으로 새김 정도가 얕아서 그 윤곽이나 모양이 뚜렷이 식별되지는 않는다.
승탑의 옥개석(지붕돌)은 지붕 아래로 2중의 서까래가 보이며 위로는 기와지붕이 막새기와까지도 섬세하게 재현되어 감탄을 자아낸다. 게다가 추녀 끝부분은 살짝 들어 올려져 경쾌하다. 지붕 위로 세운 상륜부는 꽃봉오리 모양의 앙화 위로 보륜과 보개가 얹히며 그 위로는 상대석 몸돌 받침석에 새겼던 가릉빈가 네 마리를 환조에 가깝게 사방으로 돌출된 모습으로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