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11.22 14:09

전철 문래역 계단 총총총, 오늘 아침도 습관처럼 전철을 서둘러 탑니다. 또, 어제처럼 서서 하늘같은 전철 천정을 치켜다 봅니다. 그것도 잠시, 손잡이를 잡은 오른손, 왼손과 천정을 번갈아 보고, 순간순간 한 번씩 기뻐했다가 슬퍼했다가 눈을 깜빡거려 봅니다. 떳떳하게 사는 것과 그렇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요? 이젠 이도 모른 채 외면하고 있네요, 타고 있는 전철문에게 ‘전철문아 열리지 마라’ 하며 노려도 보면서요.

물론, 혼자 있을 때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거나, 돈을 주워서 경찰서에 갖다 주거나, 그 외에 즐거웠다고 생각하는 것 등등을 떠올리기도 하죠.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즐거움이라며 전철 손잡이를 잡은 왼손을 보고 웃기도 합니다. 허허, 그런데, 그 즐거움이 지금 전철 탄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요? 그것 참, ‘그냥 지난 일이었구나!’ 하니, 지금 그러한 웃음 조각은 구겨진 일회용 종이컵과 뭐 다를 바 없어 보여요. 아무 데나 버려져 이젠 길거리에 나뒹굴어도 쳐다보는 이 없을 테니까요. 

그 이유는 참 간단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경쟁하며 사는 것이 인지상정. 그래서 언제나 세상 절반의 사람이 이익을 보면, 나머지 절반은 손해를 보지 것. 법은 그 중간에 서서 이쪽을 보다가 저쪽을 보며 선을 비뚤배뚤 긋곤 합니다. 가끔 이익을 쫓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해를 보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고요. 또 그 손해를 최소화하기에 갖가지 방법과 시간을 쓰곤 합니다. 그 이유야 이런저런 힘에 의해 오락가락하네요. 내가 먼저 살아야 하니 오락가락하며 보는 거지요.

손해를 떠안고서라도 또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박박 우긴 적도 있죠. 문제는 가까운 이들의 얼굴과 눈동자를 보는 순간, 깊은 슬픔에 빠지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깊은 슬픔의 시작은, 스스로는 절반의 아픔은 감수할 수 있겠지만, 나머지 절반은? 혼자 당장 큰 슬픔을 감내하더라도,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절반의 양심을 순간마다 버리는 것이었어요. 그때마다 슬픔이 누적되고, 그 무게로 살아온 나날이 흔들리는 걸 어쩌겠습니까. 

허허, 자연스럽게 잊게 된다고요?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요? 허허, 그것 참! 이래저래, 내 이익을 위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결국 조금이라도 자신을 괴롭지 않기 위해, 행동 하나하나에 정당성을 스스로 부여하기 시작합니다. 허허, 매번요. 이 시작이 곧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존경쟁일진대, 쓸데없이 오른손을 보며 또 생각 없이 왼손을 보다가 서로 잘잘못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거죠. 어쩌지도 못해 외치고 웃다가, 그냥 웃고 마는 것, 뭐 그래야 사는 걸 테니까요. 어차피 세상은 쓸데 있는 것 반, 아닌 것 반일 거라며.

그렇게 울다가 웃고, 뭐뭐 그러고 나면, 꼭 가끔씩 하늘을 보곤 합니다. 습관처럼요. 그리고, 그래도 절반의 양심을 지킬 수 있도록, 두 손 모아 스스로를 독려하곤 합니다. 절반은 손해를 보더라도 절반의 양심을 지키면서, 절반의 이익을 그래도 지키려 발버둥 쳐야 하리라고요. 이외에 그 어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기에 그나마 그 절반의 양심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절반에서 그래도 몸은 양심 쪽으로 향해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옆에서 서있는 사람 모르게 또 중얼거립니다. 혹시 모두가 절반의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그 절반들이 이 전철 안에 모이고 모여 서로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입니다. 이 절반의 기쁨들이 서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만족으로 인해 문래역, 아니 서울, 아니 한반도, 또 지구 모두는 큰 웃음소리로 꼭 손을 맞잡을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전철 안을 휘둘러보면서, 절반의 양심 그 기쁨을 지키기 위해, 조금 손해 볼 일이 무엇이 있는지 찾습니다. 또 어떻게 손해를 봐야 할지, 웃으며 고민하고 있답니다. 앉아도 될 앞자리가 비어있는 것도 모르고 말이지요. 지금 고민도 절반의 기쁨이라며, 고민도 기쁨의 하나라고 우기며 웃어봅니다. 하하, 내릴 곳을 저도 모르게 지나치면서요. 허, 참 우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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