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12.07 16:27

국보 제55호

- 공식명칭 : 보은 법주사 팔상전 (報恩 法住寺 捌相殿)
- 지정일 : 1962.12.20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 수량/면적 : 1기
- 시대 : 조선시대
- 주소 :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379, 법주사 (사내리)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인도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승려 의신이 처음 지은 절이다.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 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문화재청]


법주사(法住寺)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는 글자 그대로 법(法), 즉 부처님의 말씀이 머무는 절집이라는 뜻이다. 신라 진흥왕 때 의신 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오나 ‘삼국유사’는 다르게 전한다.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보면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그 후 진표 율사가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不思議房)에 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다. 그때 진표 율사가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고 하였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 법회를 열었다. 금산사를 중건한 진표 스님이 미륵불을 조성하였기에 진표 스님의 법을 받은 영심 스님 등도 마찬가지로 길상초가 난 곳에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즉, 현재의 법주사는 (진표 율사의 말씀에 따라) 영심 스님 등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보며, 고려 인조 때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 시가 실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지금까지 정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다. [법주사]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충렬왕, 충숙왕에 이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몽진하던 공민왕도 법주사에 들러갔다. 공민왕은 이때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으니, 지금도 능인전 뒤쪽에 사리탑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절 못미처에는 정이품송이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 조선 세조 때 신미대사와 각별하게 지내던 세조가 이곳에 행차할 때 임금이 타던 가마인 연(輦)이 나뭇가지에 걸릴 듯하자 스스로 번쩍 들어주어 무사히 지나가게 해 준 소나무에 정이품을 제수했다고 한다. 멀지 않은 곳에 부인 소나무로 불리는 정부인 소나무도 있어 흥미롭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법주사 대부분이 불타버리고 소실되었으나, 1605년(선조 38)부터 1626년(인조 4)에 걸쳐 사명(四溟) 대사 유정(惟政) 스님이 팔상전을 중건하였다. 이후 벽암 각성(碧巖覺性) 스님의 대대적인 중창불사와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지원으로 국가적 규모의 중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종 때에는 미륵 장륙상이 있는 2층 건물 용화보전이 헐렸다. 근대 이후에 미륵불 조성사업이 시작했으나 조각가의 요절로 중단되었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으로 완성은 했지만 시멘트로 만든 미륵불이었다. 1990년 청동미륵대불을 완성하고, 다시 2002년에는 개금불사를 마무리하니 지금의 금동미륵대불이다.

금년 6월 법주사는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 '한국의 산사' 7곳에 포함되어 자랑스러운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팔상전(八相殿)

국보 제55호 법주사 팔상전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오층 목탑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황룡사 구층탑도 목탑이었으며, 최근까지는 화순 쌍봉사 대웅전인 삼층 목탑 (보물 제163호)이 있었으나, 1984년 실화(失火)로 소실된 후 다시 지어 현재로서는 법주사 팔상전이 유일하다.
팔상전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8개로 나누어 그린 그림, 즉 팔상도를 봉안한 전각을 말한다. 여기서 여덟 가지 장면 팔상(八相)은 첫째, 도솔천에서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도솔내의상(兜率來儀相), 둘째, 룸비니동산에서 탄생하는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셋째, 태자시절의 석가모니가 성문을 나서 세상을 관찰하는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넷째, 성을 떠나 출가하는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다섯째, 눈 덮인 산에서 수도하는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여섯째,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의 항복을 받는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일곱째, 녹야원에서 최초의 설법을 하는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여덟째,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이다.


법주사(法住寺) 팔상전(捌相殿)

현재 법주사 팔상전은 1층 네 곳의 출입구를 통하여 자유롭게 안으로 들어가서 네 벽에 붙은 팔상(八相)을 한 바퀴 돌아보며 모두 친견하거나 예불을 드릴 수 있다. 위로 올라갈 수는 없지만 3층까지 탁 트인 내부를 둘러볼 수는 있다. 현재 5층 지붕 위 상륜부는 인조 때 재건한 모습 그대로 온전하다고 하는데 높이 관계로 상세히 살필 수 없었다.
또한, 팔상전 2층에 걸린 현판에는 八相殿이 아니라 捌相殿이라고 씌어 있는데 捌은 '깨뜨릴 팔'이다. 이를 두고 혹자는 여덟 그림이라는 팔상(八相) 외에 相(아상)을 捌(깨뜨린다), 즉 ‘고정관념을 내려놓아라, 깨뜨려라’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글씨를 씀에 있어 나중에 가필하여 변할 수 있는 특히 숫자에 관련된 글씨, 예컨대 一 二 三  등을 壹 貳 參으로 쓰는 것처럼 八도 捌이라 쓴 것이며, 이처럼 함부로 고치지 못하게 복잡한 글씨체로 쓰는 것을 갖은자라고 한다니 참고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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