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1.08 13:44

4시 10분.
배가 고팠다. 점심도 걸렀으니 당연하다. 무엇이고 먹고 싶었다. 어디선가 익숙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몰려왔다. 복잡한 시장길 한구석에서 구워지고 있는 붕어빵이다. 붕어빵이 고소한 냄새에다 적당히 노릇노릇 구워져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눈길도 뺏기고 마음도 뺏겼다. 살까 말까 망설이다 그만두었다. ‘어떻게 길에서 먹지 싶어’가 발목을 잡았다.

고작…….
대여섯 걸음을 걸어갔는데 뱃속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배에서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났다. 발목을 잡았던 체면을 버리기로 했다. 좀 전의 결심을 허무는 데는 겨우 몇 초. 돌아서서 붕어빵 한 봉지를 샀다. 천 원에 세 개.

전철역 승강장 의자에 앉아서 붕어빵을 먹었다. 길지 않은 생애지만 이렇게 맛있는 붕어빵은 처음이었다.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고 적당히 달았다. 두 개째 먹을 무렵에는 행복감이 절정에 다다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의 내 얼굴이 눈부시게 환했던 모양이었다. 행복감이 눈에 뜨이게 드러났던 모양이었다.

하여, ‘맛있어요?’
이제 막 전철을 타러 계단을 내려오던 노신사가 물으며 스쳐 간다.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가득했다. 나는 손에 두 개째 붕어빵의 꼬리를 들고 웃었다. 민망함과 쑥스러움에 웃기만 했다. 전철은 오지 않고 열댓 걸음 떨어져 전철을 기다리던 노신사가 못 참겠는지 성큼성큼 다가와 다시 물었다. 맛있느냐고 그렇게도 맛있느냐고.

‘하나 남았는데 드시겠어요?’
이번엔 내가 물었다. 대답을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민망함을 같이 나누려던 심사였다. 두 개를 먹었으니 허기는 면했다 싶었다. 노신사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더니 예쁘단다. 티 하나 없는 얼굴이 예쁘단다. 붕어빵을 먹다가 느닷없는 소리에 얼굴이 붉어졌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감사하다는 대답이 목구멍에 걸려 버벅거렸다.

'어디로 가세요?'
노신사가 다시 묻는다. 나는 다음 역에 내려야 한다고 했다. 그럼 역에서 갈아타실 모양이라고 그곳으로 가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한다. 이마에 써 붙였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뿌연 어두운 곳에서 덜컹덜컹 전철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타야지요?'
둠 속을 뚫고 전철이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안 타겠다고 했다. 먹을 걸 들고 타면 냄새가 날 테니 다 먹고 타겠다고 했다. 노신사는 빙긋이 웃더니 내 어깨를 툭툭 두 번 치고는 전철을 타고 떠났다. 전철이 떠나간 자리에 여운 같은 것들이 밀려와 머물고 있었다.

어떤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해야 했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스쳐 가는 사람이야 그냥 한 번 쓱 스치고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남아있는 사람은 한참을 기억해야 했다. 어쩌면 그것은 한 사람의 스침의 기억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의 느낌을 기억하려 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던 대신 '역(驛)의 효과'라 생각하기로 했다.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낯가림이 심한 내가 무장해제를 하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다른 어떤 이유도 설명이 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역이야 언제나 만남과 스침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거기다 어둑어둑 해오는 저녁 무렵이고 노신사나 나나 어느 정도 젖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얘기다. 누구나 이 시간쯤이면 약해질 대로 약해지는 것 아닌가.

인연의 시작은 그토록 느닷없이 시작되기도 하고 끝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곳으로는 역(驛)이란 곳이 최적의 장소다. 덕분에 별 것 아닌데도 주변은 화사했고 잠시 행복했다. 행복의 크기가 크지 않았어도 좋았다. 오로지 ‘남과 여’ 그 외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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