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5.24 16:26

연애가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이었다. 안경이 그렇게 거추장스러울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 30여 년 전, 손을 잡는 것조차 언감생심이었을 때였으니 혹여 다음 ‘진도’ 때문일 거라 상상하지는 않아도 된다. 테를 두른 작은 안경알이 연인과의 시선을 가로막는 양 여겨졌다. 입에 앞서 눈으로 이심전심 주고받고픈 이야기가 많건만, 안경은 전달의 순도를 떨어뜨리는 것만 같았다.

내 안경의 시작은 초등 4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여자 담임선생님을 우리 반 아이들은 많이 따랐다. 학년이 끝나던 날, 선생님은 바라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라 했고, 우리는 합창으로 “안경 벗어보세요!”를 외쳤다. 그런데 검은 뿔테안경을 벗은 선생님은 우리 선생님이 아니었다. 뭔가가 빠진 맹숭한 얼굴은 그간의 정마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게 했다. 괜한 요청을 했구나, 어린 나이들임에도 알아채고 계면쩍어했던 기억이 여태 생생하다. 동시에 안경을 써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고나 할까. 그 선생님과 같은 안경을 쓰고 싶어졌다.

눈을 책에 바짝 들이대 위아래로 마구 오가게도 하며 얼른 시력이 나빠지길 바랐다. 결국 중학생이 되면서 기어코 안경을 쓰고 말았다. 선생님처럼 검은 뿔테안경을 쓰니 나름 폼이 나는 듯했다. 대학 입학 후 첫 미팅자리에서는 그 절정의 순간을 맛보기도 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앉은 한 남학생이 “저기, 나나무스꾸리 같이 생긴 분!”하고 나를 부르지 않는가. 참석자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던 그리스의 여가수 같다고? 그냥 그녀의 검은 뿔테안경만을 지칭한 거였어도 좋았다.

‘안경녀’ 세상

하지만 그 순간이었을 뿐 여자로서 안경은 폼의 마이너스 요인이 됐다. 첫 승객이 안경 쓴 여자이면 재수가 없다는 불평을 택시기사들이 대놓고 하던 시절이었다. 폼 때문에 쓰기 시작했다가, 입시준비로 눈이 혹사당하며 필수품이 되더니, 폼 때문에 벗어야 했다. 모습이란 뜻의 폼(form)으로 인해 살고生 죽는死 안경의 ‘폼생폼사’였다. 콘택트렌즈를 시도했지만 번거로워 그만뒀다. 직장일로 시력은 더욱 약화돼 벗어놓은 걸 못 보고 밟거나 깔고 앉는 안경 참사도 일어났다. 이미 떼려야 뗄 수 없게 된 안경을 눈에 콩깍지가 쓰여 벗으려 하다니!

이후 나는 결혼식 때와 여권사진 촬영 때를 빼곤 안경을 벗고 나선 적이 없다. 시력교정술을 받은 지인들이 꾀어도 요지부동이었다. 대신 안경 개수만 자꾸 늘렸다. 폼 살려야지, 노안도 오지, 허드렛일할 때의 안경에다, 안경을 찾는 안경과 자외선이 강한 요즘은 선글라스도 두엇 있어야지. 그중 가장 좋아하는 건 역시 검은 뿔테안경이다. 독특해 뵈는 안경 뒤로 눈가 주름이며 표정이며 자기를 슬쩍 감추게도 해준다. 유명인들이 법정에 설 때면 왜 느닷없이 검은 뿔테를 쓰는지 알 것도 같다. 일부러 폼을 한풀 죽이고 싶은 게 아닐까.

그러나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닌데도 여자가 안경을 쓰면 그렇게들 보았다. 못생기고 드세고 부담스럽게 보는 부정이 대세고, 지적이라든가 카리스마나 매력 있게 보는 긍정은 드물었다. 이제는 옛말이 되고 있다. 나나무스꾸리처럼 안경 가수의 전설이 된 이선희 씨와 컬링의 ‘안경 선배’ 김은정 선수, 여자 아나운서로는 첫 ‘안경녀’인 임현주 앵커 등이 주목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유튜브에는 안경녀의 메이크업을 위한 동영상이 1백여 개나 올라있다 하고, 안경을 쓴 모델이 세계 패션무대를 활보하니 세상이 달라지고 있긴 하나 보다. 


‘인폼생인폼사’?

안경 가운데서도 폼의 정점을 찍어주는 건 아무래도 선글라스다. 시선을 안 끌려고 쓰는 건지, 끌려고 쓰는 건지 모를 명사들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던 선글라스는 점점 누구나의 패션소품이 되고 있다. 매년 유행하는 형태가 바뀌고, 거기 맞춰 바꿔 쓰고는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는다. 이를 스마트폰의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올려놓은 지인들도 적지 않다. 여느 사진들보다 폼이 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시선을 가려 상대보다 우월적 위치에 있는 느낌이 들 수도 있어서라면 나의 해석이 과한 것일까? 

비오는 날만 빼고 나는 잠시 외출에도 선글라스를 챙긴다. 근시에 노안도 진행 중이라 햇빛으로 인한 안질환의 예방차원이다. 또렷한 시야도 확보돼야 하니 렌즈의 색상과 농도, 도수가 중요하다. 이것들만 잘 맞으면 유행이 오든지, 가든지 구닥다리형이라도 쓴다. 폼이 가장 중시되는 선글라스에서 정작 폼생폼사가 별로 작용하지 않는 셈이다. 지나쳐도 문제지만, 폼생폼사에 무뎌질수록 늙어가는 증표는 아닐까 해서 안경점 쇼 윈도를 힐끗거릴 때도 있다. 하기야 스마트 안경을 쓰게 될 날이 머지않다는데, 까짓 선글라스가 대수이련마는.

앞으로 10년쯤 후면 스마트폰을 대신하는 스마트 안경시대가 열린다고 한다. 안경으로 문자를 보내고, 이메일을 주고받고, 넷플릭스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세상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정보가 눈에 바로 투영될 수 있는 세상이 오는 것이다. 그때쯤이면 폼생폼사의 폼은 정보를 알게 한다는 뜻의 ‘인폼(inform)’으로 바뀌는 건 아닐까. 폼생폼사에서 이른바 ‘인폼생인폼사’로 스마트 안경시대가 대두될지도 모르겠다. 그 시대를 즐기려면 폼생폼사 이전에 눈 관리나 잘하고 있는 게 장땡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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